최치원, 이인로, 율곡 이이까지… 유람하고 즐기며 기록 남겨
지리산에 피아골 삼홍소三紅沼가 있다면 가야산엔 홍류동紅流洞이 있다. 홍류동은 지금은 설악산이나 내장산, 지리산 등의 명성에 밀려 단풍 명소로서는 다소 빛이 바랜 듯하지만 적어도 조선시대까지는 최고의 단풍 명소로 이름을 날렸다.
홍류동계곡에 다녀간 학자들의 면면이나 남긴 기록만 봐도 그 명성을 알 수 있다. 가야산에 최초로 기록을 남긴 학자는 신라시대 최치원. 이미 알려진 대로 그는 가야산 학사대에서 신발과 갓을 벗어 놓고 가야산 신선이 되기 위해 입산한 것으로 전한다. 이어 고려 이인로, 조선 들어서 율곡 이이, 한강 정구 등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전부 가야산을 찾았다. 그들이 찾은 이유는 홍류동의 아름다운 경관과 가야산의 심산유곡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최치원이 쓴 시로 전하는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다.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거세게 흐르는 물 바위를 치며 산을 올리니/
지척 말소리도 분간하기 어렵네/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세라/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물론 단풍을 노래한 시는 아니지만 홍류동계곡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려 이인로는 <파한집破閑集>에서 ‘그가 신던 신발과 그가 쓰던 갓만이 숲 속에 버려져 있었다’며 최치원이 신선이 되기 위해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율곡 이이도 <유가야산부>에 홍류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아름다움을 읊고 있다.
‘하늘을 찌를 듯 험한 길을 밟고서, 동굴 입구의 돌문을 두드렸네. 참으로 이미 기이한 경지에 마음이 맞았기에, 위험한 곳을 무릅쓰고서 판판한 평지와 같구나. 어두운 골짜기의 깊은 굽이를 찾아들고, 높은 언덕의 가파른 고개를 오르니, 천태산 폭포가 벼랑에 흘러내리고 형악衡嶽의 구름과 안개가 갑자기 개이네. 기이한 바위가 주위에 벌려 있고, 푸른 절벽이 사면으로 둘러싸여, 돌에는 붉은 전자篆字가 새겨 있고 물결에는 은은히 천둥소리가 일어나는데, 이곳이 이른바 홍류동이다.’
조선 선비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쓴 <유가야산록>에도 홍류동 기록이 전한다.
‘홍류동계곡의 물줄기는 바위틈으로 어지러이 쏟아져 시끄럽게 흘렀다. 그 소리는 마치 천둥치듯 쾅쾅 울렸고, 밝은 대낮에 이리저리 날리는 물방울은 숲과 나무다리로 흩어졌다. 그 물은 한 굽이에 머물러 빙빙 돌기도 하며 흐른다. 어떤 것은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드높은 산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로 소나무와 전나무 숲은 울창했고 바위 절벽은 웅장했다. 계곡물은 8, 9리 정도 이어졌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맑고 기이한 광경이 연출되어 눈은 휘둥그레졌다. 정말 아름다운 경치였다.’
지금 가야산은 능선과 산줄기가 잘리고 토막 나서 볼품없이 돼 버렸지만 조선시대까지는 전국 어느 산보다 산세가 깊었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 가야산 홍류동계곡이 지금 ‘가야산소리길’이란 걷기 좋은 길로 거듭났다.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선비들의 자취를 느끼고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삼홍소와 같이 홍류동이란 지명 유래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현지 향토사학자와 가야산국립공원사무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최치원의 시에 있다”고 말한다. 어느 시인지는 모른다. 구전으로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 단풍으로 붉게 물든 계곡물이 흘러 홍류동이라 했다’고 한다.
봄에 꽃으로 붉게 물들면 복숭아꽃뿐이다. 우연인지 원래 그러했는지 홍류동 입구가 무릉동이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복숭아꽃 만발한 무릉과 같은 지명이다. 최치원이 신선이 되기 위해 입산한 산의 분위기는 적어도 이 정도는 맞아떨어져야 되지 않겠나. 하지만 지금 어디에도 복숭아나무는 없다. 주민들의 말을 빌리면 옛날에는 복숭아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말이다.
홍류동계곡 입구로 들어서면 활엽수와 어울린 노송이 기다린다. 계곡 옆 운치 있는 길이다. 지금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조선시대는 훨씬 더 신선 같은 분위기였으리라.
한강 정구는 9월, 즉 지금 양력으로 10월에 유람했다. 그러면서 “가을 (단풍) 구경으로 약간 철이 이르다”고 대화를 주고받는다. 강절康節이 노래한 ‘看花取蓓蕾간화취배뇌(꽃구경은 피기 전의 꽃봉오리 보는 것이 좋다)’란 시로 대신하면서 자위한다. 구경하는 그 자체가 다행이고, 행복이란다.
홍류동계곡은 활엽수와 단풍나무가 우점종이다. 계곡 수량은 조금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마르지 않는다. 잎이 붉게 변하기 위한 수분은 항상 준비돼 있다. 단풍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쉬엄쉬엄 계곡 따라 1시간쯤 올라가면 농산정이 나온다. 각종 석각이 빼곡하다. 누가 쓴 글씨인지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최치원, 우암 송시열 석각까지 있다고 하나,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석각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재미는 쏠쏠할 것 같다. 홍류동紅流洞, 자필암泚筆巖, 취적봉吹笛峯, 광풍뢰光風瀨, 제월담霽月潭, 분옥폭포噴玉瀑布, 완재암宛在巖 등…. 최치원이 쓴 글씨로 알려진 ‘제가야산독서당’도 보인다.
단풍도 형형색색 눈에 호사를 제공한다. 이미 낙엽이 된 잎, 단풍이 붉게 물든 잎, 아직 녹색을 간직한 잎 등 제각각이다. 마치 인간 군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것이 산의 색깔인지 모른다. 산의 안팎은 푸르고 붉고 누렇고 흰 빛깔이 어울려 종합적인 하나의 색으로 발한다. 빛과 색깔이 어울리고, 밝음과 어둠이 조화를 이룬다. 단풍의 붉은색만 보는 게 아니라 조화를 보게 하는 것도 단풍이 주는 멋이다. 이 가을에 그 멋을 맘껏 향유해 보자.
가야산은 그 멋진 풍광으로 8경이 아니라 19경을 자랑한다. 해인사에 있는 한 암자의 처마 밑에 19경을 그대로 적시하고 있다. 16경까지가 홍류동계곡에 있다. 그만큼 홍류동계곡은 명불허전이다.
제1경 멱도원覓桃源. 가야산 속의 무릉도원을 상상하면서 그 승경을 찾기 위해 멀리 가야산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제2경 축화천逐花川. 가야산 홍류동계곡 속에 흘러나오는 꽃잎을 따라 올라간다는 의미다. 제3경 무릉교武陵橋. 고려 이인로의 <파한집>에 ‘독서당에서 동구의 무릉교까지는 거의 10리 정도의 길이라. 단애벽령丹崖碧嶺에 송회가 창락하고…’ 하는 무릉교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로 미루어 농산정 근처의 계곡 위로 추정된다. 제4경 칠성대七星臺. 기도 중에 칠성이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다. 제5경 홍류동紅流洞. 계곡 중 수석과 삼림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근처에 최치원과 관련된 농산정, 사당, 비석 등이 모여 있다. 바위에 ‘홍류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제6경 농산정籠山亭. 제7경 취적봉翠積峰. 선인이 내려와 피리를 불던 높은 바위라는 뜻. 제8경 자필암. 바위에 붓을 간추려서 글을 기록한다는 의미다. 제9경 음풍뢰吟風瀨. 풍월을 읊는 여울. 제10경 광풍뢰光風瀨. 선경의 풍경이 빛나는 여울이라는 뜻이다. 제11경 완재암宛在巖. 선경이 완연히 펼쳐 있는 바위. 제12경 분옥폭噴玉瀑. 옥을 뿜듯이 쏟아지는 폭포라는 뜻. 제13경 제월담霽月潭. 달빛이 잠겨 있는 연못. 제14경 낙화담落花潭. 꽃이 떨어지는 소. 제15경 첩석대疊石袋. 암석이 쌓여 있는 대. 제16경 회선대會仙臺. 선인이 모여 있는 바위. 제17경 학사대는 최치원이 떠난 자리다. 제18경 봉천대奉天臺. 가야산 중턱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마지막 제19경 우비정牛鼻井. 가야산 꼭대기 석굴 속에 있는 샘이다. 가야산은 우두산으로도 불리는데, 그 코의 위치에 해당한다고 한다.
올가을에 단풍을 감상하고 19경 비경을 확인하기 위해 가야산 홍류동계곡으로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