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行·탐방·名畵/기행·여행.축제

[기록에 전하는 단풍 명산 <2>│김창흡 <유봉정기遊鳳頂記> 따라 설악산 르포] “단풍이 더욱 붉어지려 해 유람 가고 싶다”

바람아님 2018. 10. 15. 08:36
조선일보 : 2018.10.02 11:29 월간 山 [588호] 2018.10
  • 글 월간산 박정원 편집장


설악산 6년 살면서 고양된 감흥 억제할 수 없어 첫 유람기 남겨…
9월 27일쯤 올 첫 단풍

 ‘아침저녁으로 무청정茂靑亭(영시암에 딸린 정자)과 소광대昭曠臺 사이에서 노닐며 단풍의 엷고 짙음을 평하고 봉정鳳頂의 완상에 대해 이야기하니, 감흥이 고양되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 (중략) 달은 밝아지고 단풍은 더욱 붉어지려 하여 유람을 가고 싶어 했다….’- 김창흡 <유봉정기遊鳳頂記> 인제문화원 刊 <조선 선비, 설악에 들다> 참조


예나 지금이나 산이 사람을 부르는 것 같다. 김창흡도 설악산 단풍이 짙어갈 무렵 유람을 떠난다.

홍태유(1672~1715)는 설악산 단풍계절에 맞춰 유람을 하면서 ‘가을이라 선홍색으로 물들어 그림으로 단장한 수놓은 병풍 같다’고 설악산의 아름다운 단풍을 노래했다.  


설악산의 올해 첫 단풍은 9월 27일쯤 시작된다. 그때부터 단풍은 시속 20km 내외로 남하한다. 보름 뒤인 10월 중순경 절정으로 한껏 뽐낸 뒤 남한의 산을 온통 단풍으로 붉게 물들인다. 그리고 한 달여 뒤인 10월 말쯤, 단풍은 해남 두륜산에서 절정의 순간을 알리고 장렬히 낙엽으로 운명을 고한다.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는 “올해 단풍이 유달리 고울 것 같다. 단풍이 들기 시작할 무렵 많은 비가 내려 계곡마다 물이 넘쳐흐른다. 또 지난여름 유난히 더웠기 때문에 활엽수 잎들이 무성했다. 그 잎들이 적절한 수분을 공급받아,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지면 단풍은 원색에 가까운 깊은 색을 띤다”고 밝혔다. 가을 폭우로 지금 설악산은 계곡마다 물이 넘쳐난다. 흐르는 물소리는 갖가지 상념들을 씻어준다. 


설악산 연간 방문객은 350만 명 내외. 2017년 방문객은 369만3,991명이었다. 대략 370만 명. 이 중 10월 방문객은 지난해 96만 1,074명이었다. 4분의 1이 10월에 집중적으로 찾는다. 2016년 10월에도 96만여 명이었다. 올해는 곱게 물든 단풍으로 인해 사상 첫 1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설악산 10월 단풍 행락객 사상 첫 100만 명 돌파’란 기사가 도하 각 언론에 보도되지 않을까 싶다. 


설악산은 남한의 단풍 일번지다. 빨간 단풍이 드는 당단풍나무와 개옻나무, 노란 단풍이 드는 생강나무·만주고로쇠·참나무류 등이 특히 많아 더욱 울긋불긋하게 만든다. 이렇게 유명한 단풍 명산이 과거에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 선비들이 설악산에서 단풍을 찾아 유람한 기록을 찾았다. 서문에 밝히 기록은 조선 최고 명문가 김창흡의 <유봉정기> 앞부분이다.


설악산 단풍이 절정에 달하고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1 봉정암 석가사리탑에 신도들이 절을 하고 있다.

2 오세암에서 봉정암 올라가는 길 중간에 나오는 대장암 바위.
3 김창흡이 쌍폭으로 표현한 폭포가 지금도 그대로 흐르고 있다. 사진 박정원


조선 최고 명문가 선비 설악산에 은둔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호는 삼연. 좌의정 김상헌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이며, 형은 영의정을 지낸 창집과 예조판서 등을 지낸 창협 등이다. 할아버지 좌의정 김상헌이 영화 ‘남한산성’의 실존 인물이다.


김창흡은 벼슬에 뜻이 없어 자연에 묻혀 산다. 특히 영시암은 그가 직접 지은 거처였으며, 그의 사후, 설정 스님이 사찰로 중건했다. 유학의 불교화다. 그는 음력 9월 8일 설악산 유람을 떠난다. 지금으로 치면 10월 초쯤이다. 단풍이 절정에 이를 때다. 그의 동선은 그의 거처 영시암에서 유홍굴을 거쳐 오세암~봉정암~쌍폭~수렴동~구곡담을 거쳐 다시 영시암으로 돌아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코스가 전통적 단풍 명소다. 당시 영시암은 현 위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현재의 영시암을 중건한 전 백담사 주지 도윤 스님은 지금의 위치가 맞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1960년대 초반 봉정암과 오세암을 중건하면서 들어온 뒤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내설악의 산증인이었던 도윤 스님은 지난해 기자에게 설악산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준 뒤 지난 5월 아쉽게 타계했다.


김창흡은 심원사深源寺(현 백담사) 승려를 길잡이로 삼고 유람을 떠난다.

‘표묘등縹緲磴(영시암과 수렴동 사이 고갯길)을 지나 깊은 숲을 뚫고 가다가 귀담龜潭(현재 수렴동대피소 직전의 못)에 이르렀다. 수석은 그다지 특이하게 빼어나지는 않지만 이끼 낀 절벽과 구름 걸린 소나무가 제법 그윽한 풍취가 넉넉하다. 멀리 보이는 봉우리 중에 또한 눈여겨볼 만한 것이 있어 더욱 흥을 지속시킨다.’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봉정암으로 올라간 사실을 알 수 있다. 흐르는 물소리가 귀를 씻어낸다. 아니 마음까지 씻어준다. 길 자체가 귀를 씻고 마음을 씻고 걸으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이른바 세심洗心과 세이洗耳길이다. 그것이 곧 도道다. ‘道’는 사람이 걸으며 생각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글자다. 자연과 더불어 살며, 자연 속을 걸으면 그것이 곧 구도행위인 것이다. 조선 선비들의 유람은 바로 구도행위의 일환이었다. 조선 선비 김창흡은 이미 설악산 생활이 익숙했는지 단풍에 대한 설명보다는 전체 풍광을 잘 보여 준다.


‘계곡물은 돌벼랑을 따라 흐르면서 구부러질 때마다 맑은 물굽이를 만든다. 따라 들어가니 그윽하며 특별한 오솔길이 있다. 몇 리를 앞으로 가니, 북으로 거대한 절벽이 높이 솟아 있어 하늘과 가로로 걸쳐 있는 것이 수백 보쯤 된다. 쳐다 보니 아찔한 것이 넋을 흔든다.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바라보니 완전히 성대한 기세라 더욱 기이하고 위대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것을 곤륜昆侖이라 부르고자 한다. 모두가 절벽을 바라보며 절경이라 한다. 절벽 밑을 휘감는 계곡물이 여울에서는 씻어내다가 못에서는 머무르니, 묘하게도 물은 깊고 산은 우뚝한 운치가 있다. 좋은 곳을 택해 대臺를 쌓고 영원히 세상을 떠나 은둔하고 싶었으나 그럴 겨를이 없다.’


설악산의 절경에 흠뻑 빠진 그는 용아장성의 웅장한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한 듯하다. 지금 수렴동대피소 부근이 용아장성의 시작이자 끝 지점이다. 봉정암으로 올라가는 구곡담 계곡을 따라 왼쪽과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암벽 봉우리들이 전부 용아장성이다. 바라만 봐도 아득하다. 마치 속세와 선경을 구분하는 경계선 같다.


김창흡은 구곡담계곡을 들어서기 전 동쪽 오세암 방향으로 향한다. 구곡담계곡으로 계속 가면 봉정암으로 가는 방향이다. 그는 폐문암閉門巖에 도착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 폐문암이 용아장성의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지점이 아닌가 여겨진다. 용아장성 안으로 들어섰다는 의미다.

설악산 소승폭포 주변에도 단풍으로 물들어 있다.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설악산 오세암 앞쪽으로 보이는 용아장성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하늘을 찌르는 듯하다. 사진 C영상미디어

1 9월 초순 현재 용아장성은 아직 단풍과는 멀어보인다.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2 울긋불긋 짙게 물든 단풍들이 행락객을 불러들인다. 사진 C영상미디어

3 설악산 천불동계곡에도 단풍이 찾아와 계곡을 물들이고 있다.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4 하늘과 맞닿을 듯한 설악산 용아장성의 봉우리들도 단풍이 뒤덮이고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옥 같은 산, 비단 같은 나무들 빛 발해

‘양쪽 벼랑이 하늘을 치받고 솟아 있으니 실로 대적하기 힘든 적수 같다. 대개 한 번에 녹아서 이루어진 것이지 이리저리 모아서 만든 것이 아니다. 굳건한 것은 돌 부채이고, 펼쳐진 것은 너럭바위이다. 또 번갈아 계단이 된다. 여울과 못이 서로 이어져 있으니 위쪽 못의 잔물결은 무늬 있는 비단 같고, 아래쪽 두 못은 경울이 상자에서 나온 것 같아, 티끌 없이 깨끗한 것이 견줄 데가 없다. 구름이 양쪽 벼랑 사이에서 나와 유유히 흘러가고, 옥 같은 가파른 산과 비단 같은 나무들이 빛을 낸다.’


구름과 그 사이로 솟은 암벽 바위, 계곡과 못, 그 사이에 있는 돌과 바위, 거기로 흐르는 물과 물소리, 단풍으로 물든 비단 같은 잎 등 설악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름답다는 형용사보다 구체적인 사실 하나 하나씩 설명하며 뛰어난 경치를 보여 준다. 역시 문장가다운 문체다.


그는 가야동계곡을 언급하면서 오세암에 대한 설명이 없다. 물론 봉정암까지 갈 길이 바빠 언급 안 했을 수도 있지만 옆에 있는 절을 두고 본 체 만 체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가야동계곡에서 지금 오세암 가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었든지, 아니면 오세암이 없었든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여지도서>에 백담사와 봉정암, 그리고 영시암을 들고 있다. <인제현읍지>에는 ‘오세암은 설악산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은둔했기 때문에 오세암이라고 칭하며, 매월당의 영당이 있다고 적고 있다. 김창흡은 <삼연집>


다른 부분에 ‘오세암에 도착하여’란 한시를 남겼다. ‘내 설악의 주인이 되면서부터/ 자주 오세암에 놀러왔는데/ 글에 능한 나그네와 짝하니….’ 이로 볼 때 그는 오세암도 자주 들렀던 듯한데 언급이 없는 것은 아마 살짝 옆길로 빠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큰 비가 온 뒤로 계곡 길이 뒤바뀌고 나무가 뽑히며 비탈길이 무너졌으나 길을 고칠 수도 없다. 대개 들쑥날쑥한 나무 사이로 서리 맞은 낙엽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어서, 더욱 넘어지기가 쉽다. 걸음마다 마음 졸이며 지나가니 북쪽에 작은 폭포가 있다. 5리를 가서 빙호동氷壺洞(가야동계곡에서 봉정암으로 가는 방향으로 있는 계곡) 입구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큰 계곡을 버리고 남쪽으로 가면 봉정으로 가는 길이다. 바위 사이에서 불을 때서 밥 먹는 곳을 만들었다.’


그는 식사 후에 오솔길을 따라 남쪽으로 갔다. 침침해 길을 잃을 것 같아 중들이 돌을 쌓아 표식을 해둔 것으로 길을 찾아갔다고 한다. 호랑이 나오던 시절 산을 다니려면 길을 찾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산 암자에 사는 승려들도 길을 잃을 우려가 있어 돌로써 길 표식을 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소나무와 전나무가 엄중하게 우거진 속에 작은 시내가 폭포를 이루어 자주 그 옆에서 쉬었다. 북쪽으로 여러 봉우리들을 바라보니 하얀 것이 마치 빙호동에 쌓인 옥처럼 밝게 빛나 시선을 빼앗지만 형용할 수 없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한 번씩 돌아보니 번갈아 기이함을 드러내는 봉우리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게다가 손가락으로 가리킬 틈도 없이 앞에서 갑자기 솟아오르니 또한 무한히 쉬게 해주는 곳이다.’


빼어난 경치에 길까지 잃어버릴 정도

너무 빼어난 경치에 정신이 팔려 길을 잃어버렸던 전 해의 사건을 떠올리며 다시 경치를 감상한다. 얼마나 풍광이 뛰어났으면 길을 잃어버릴 정도일까. 그것도 구곡담보다는 한 수 아래로 평가되는 가야동계곡에서. 그는 봉정암을 거쳐 구곡담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대장암 바위에 이르렀다. 가야동계곡을 지나 봉정암 가는 능선 길 중간쯤에 마치 책을 차곡차곡 쌓은 듯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 바위를 대장암 바위라고 표현한 듯하다. 그는 대장암을 ‘질서 정연하게 겹쳐진 돌이 자못 대장경이 저장된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다’라고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 300여 년 전, 아니 수백 수천 년 전과 현재 모습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대장암 서남쪽으로 가파른 봉우리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고 했다. 실제 그 방향으로 용아장성의 가파른 봉우리들이 하늘과 맞닿을 듯 운무에 반쯤 가린 채 절경의 빛을 발한다.


‘동쪽으로는 천상의 맑은 기운을 거둬들여 아득히 하늘과 바다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 수백 보를 오르고 올라 우러러보니 천문이 느닷없이 열린다. 중 하나가 구름을 헤치고 내려오니 비로소 봉정암이 가깝고 비어 있지 않음을 알았다. 고달픔을 무릅쓰고 한번 내닫으니 여기가 탑대(석가진신사리탑)의 북쪽이다. 큰 바다가 눈에 가득하고 여러 산들이 모두 다리 아래에 있다.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마치 나부끼게 하려는 것 같다. 중이 옆에 서서 멀리 정북쪽의 안개와 눈 속에서 빛나는 것을 가리켜 금강산의 구정봉이라 한다. 이 대는 산의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총뇌總腦가 된다. 그 훌륭한 경치를 논한다면 아주 뛰어나 견줄 바가 없다고 이를 만하다.’


봉정암 터는 설악산의 핵심인 듯

보물 제1832호인 석가사리탑 바로 위 용아장성이 끝나는 지점을 말한다. 봉정암이 발아래 내려다보인다. 석가사리탑은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에 있다. 그는 ‘탑이 우뚝하고 바위가 귀부가 되었는데 모두 3층이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지금의 모습은 5층의 탑신부에 기단부는 바위에 쌓았다. 기단부의 귀부는 그렇다 하더라도 3층이 5층으로 변한 건가…. 정확히 알 수 없다.


봉정암은 여러 바위를 등지고 있다. 그는 마치 신이 지키는 것 같다고 했다. ‘한 봉우리가 유독 암자에 가까이 있는데 산이 마치 봉황이 부리를 드리운 것 같아 거의 무너질 듯하다. 암자가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산의 봉황은 사람으로 치면 정수리다. 즉 봉정암 자리가 설악산의 정수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봉황에 대한 설명이 조금씩 다르다. <봉정암누리집>에는 ‘봉황새가 부처님의 정수리로 들어갔다’고 해석한다. 김창흡은 ‘봉황이 부리를 드리운 것 같다’고 했다. 안석경은 ‘봉황이 머리를 들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어쨌든 이곳은 봉황과 관련 있는 듯하다. 그래서 봉정암이 한국에서 가장 기가 센 장소고, 한국 산신의 메카라고 했나.


그는 ‘있는 곳이 높아 꿈도 인간세계가 아니다’며 봉정암에서 환상적인 하룻밤을 보낸다. 12폭포 쪽으로 향한다. 20년 전에도 한 번 왔다며, 그때에도 길이 험해 떨어질 듯 아득했다며 봉정암 중에게 줄을 빌려 내려간다. 아마 지금 해탈고개로 불리는 깔딱고개길을 가리키지 싶다. 그는 길이 험해 혼쭐이 난 뒤 비로소 계곡 길에 다다른다.


‘12폭포가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계곡을 따라가다 자주 아름다운 곳을 만났는데 못과 폭포가 서로 이어져서 받아들이고 내뿜는 것이 마치 수정으로 만든 병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다. 제일 마지막 폭포 하나는 더욱 기이하고 아름답다. 단풍 숲 사이에서 빛나는 것이 흰 명주와 주렴이 날리는 듯하다. 여기에서 쌍폭이 하나의 못으로 함께 떨어진다. 동쪽에서 나온 것은 사람과 함께 와서 그 근원을 알 수 있으니, 남쪽에서 나온 것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듯해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없다. 그 높이를 헤아리니 동쪽은 짧고 남쪽은 긴데, 짧은 것은 30장쯤 되고, 긴 것은 100장쯤 된다. 남쪽 폭포 위로 3층 폭포가 더해지니 아득하고 뿌옇게 되어서 자줏빛 산과 경계가 없다.’


아마 쌍폭을 가리키는 것 같다. 쌍폭의 모습이 수무지개와 암무지개가 지붕 없는 우물에서 함께 물을 마시고 훨훨 날아가는 것이 해오라기가 춤추고 용이 오르듯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쌍폭을 몇 번이나 지나쳤지만 김창흡의 감흥만큼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감성이 있어야 감흥이 일고, 그 감흥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무지개와 해오라기를 찾을 텐데, 기자생활 만 30년 동안 감흥보다는 사실을 더 찾은 듯해 해오라기와 무지개를 보지 못한 게 아쉽다. 쌍폭도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봉정부터 쌍폭까지 거의 20리라고 밝히고 있으나 그 정도는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쌍폭부터 15리를 걸어 상수렴(구곡담계곡의 윗부분)에 도착했고, 다시 5리를 가서 하수렴에 이르렀다. 

‘겹쳐지고 쌓인 높은 봉우리들이 좌우로 산세를 지고 솟아 있는데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 가운데는 골짜기를 열어 젖혔는데 넓고 확 트인 것이 깨끗하고 상쾌하다. 위아래 수백 보는 둥근 못, 넓은 폭포, 얕은 여울, 돌아드는 물굽이, 너럭바위, 우뚝 선 벼랑, 깊은 골짜기, 평평한 터 등이 적절하게 배치되고 알맞은 자리를 얻어서 곡진하게 운치가 있다. 골짜기 입구는 확 트였는데, 한 줄기 은빛 성이 가로로 걸쳐 있으니 고명재高明岾이다.’


구곡담계곡의 모습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봉정과 쌍폭의 험준한 길을 회고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 험한 길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이 산의 주인이 된 후부터 백연의 원류와 크고 작은 설악의 고개에 있는 것들을 모두 에워싸 소유하고 있어서 마음대로 오갈 수 있어 즐겁다’고 한다.


‘나는 실로 해마다 거듭 감상했으니 행운이다. 하룻밤 자면서 밝은 달과 맑은 아침 해를 만났다. 때마침 백년에 한 번 온 비로 바위와 계곡물이 크게 씻어졌고, 큰 비가 그쳐 못이 맑고 찬 서리에 단풍은 밝아 가지각색으로 눈을 비비게 하고 가슴을 씻어주었다. 좋은 날, 아름다운 경치, 감상하는 마음, 즐거운 일이 아우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니, 비록 말을 잊고자 하여도 그럴 수 있겠는가?’


그는 ‘금강산을 5번이나 유람했고, 설악산에 6년 살았는데 한 번도 유람기를 지은 적이 없었으나 지금은 흥취 때문에, 그리고 늙어서도 산을 사랑함을 알게 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 흥이 더욱 격렬해져 유람기를 기록한다’며 마쳤다.

조선 선비들의 구도 과정도 뛰어난 풍광 앞에선 맥을 못 추는 꼴이다. 오랜 감흥에 구도를 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