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56] 산골짜기의 '辰韓 우두머리' 무덤

바람아님 2019. 1. 2. 09:00

(조선일보 2019.01.02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청동제 꺾창집, 용전리 목관묘, 국립경주박물관.청동제 꺾창집, 용전리 목관묘, 국립경주박물관.

2004년 3월 10일, 정성희 학예관과 이재열 학예사 등 국립경주박물관 조사단은

경북 영천 용전리에서 열흘간의 일정으로 긴급 발굴에 들어갔다.

넉 달 전 중장비로 자신의 비탈진 밭을 파던 주민이 유물 15점을 발견해 신고했다.

현지답사에 나선 이 학예사 등은 유물을 추가로 확인했다.


중요 유적이 훼손되고 말았다는 안타까움을 뒤로한 채 이 학예사는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난 유물들부터 차례로 확인했다.

낫·도끼·재갈 등 철기와 함께 한(漢)에서 들여온 오수전, 금동제 쇠뇌[弩] 방아쇠틀 등 수십 점이 드러났다.


포클레인 이빨 자국이 선명한 생토면(生土面) 한복판에 길이 3.25m, 너비 1.66m 크기의 무덤구덩이 윤곽이 확인됐다.

이미 많은 유물이 나왔기 때문에 깊이가 얕을 것으로 예상하고 파들어 갔다.

흙과 함께 구덩이를 굴착할 때 나온 크고 작은 돌들이 채워져 있었다.


좁은 구덩이 아래로 1m 이상 파내려 갔지만 바닥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50㎝가량 더 내려갔을 때 정교한 무늬가 조각된 청동제 꺾창집 하나가 벽에 붙은 채 발견됐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희귀한 유물이었다.

그 속엔 물체를 찍어 끌어당기는 데 사용하는 전투용 무기인 철제 꺾창이 끼워진 채 남아 있었다.


발굴 기간을 연장하고 조사를 이어갔다. 목관 내부, 무덤 바닥의 요갱(腰坑·부장품을 묻기 위해 파낸 구덩이) 등 곳곳에서

청동거울 조각, 유리구슬, 은제 칼집 부속구 등 100여 점의 유물이 더 쏟아졌다. 삼한에서 화폐처럼 쓰였다고 전해지는

주조철부(鑄造鐵斧·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만든 도끼)가 25점이나 포함돼 있었다. 무덤의 깊이는 2.75m에 달했다.


조사단은 무덤 주인공을 기원전 1세기 무렵 철을 매개로 주변 지역과 교류하던 인물로 추정했고,

학계 일각에선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산골짜기에 나뉘어 살며 6개의 촌을 이루다가 마침내 신라를 세웠다는

고조선의 유민(遺民)으로 보기도 한다.

어느 견해를 따르더라도 당시 영남 각지에 웅거하던 진한 '우두머리'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