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57] 5500년 前 한강변 신석기 마을

바람아님 2019. 1. 9. 08:47

(조선일보 2019.01.09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71년 11월 12일, 국립박물관 한병삼 고고과장은 김종철 학예사 등과 함께 서울 암사동 한강변에서 신석기문화 해명을

위한 연차 발굴에 나섰다. 암사동 유적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의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때 다량의 빗살무늬토기와

석기가 노출되며 발견되었고, 광복 후 여러 조사팀이 간헐적으로 발굴하였으나 정확한 양상은 오리무중이었다.


빗살무늬토기, 암사동 집자리, 국립중앙박물관.빗살무늬토기, 암사동 집자리, 국립중앙박물관.


조사원들은 추수를 끝낸 밭에 한강과 나란한 방향으로

길이 33m, 너비 12m의 발굴 구역을 설정한 다음

토층(土層) 확인용 도랑을 좁고 깊게 팠다.

강변에 형성된 자연제방이었기에 여러 색조의

모래층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맨 위엔 밭으로 경작되던 겉흙이 있었고 아래로

내려가며 백제층, 신석기층 등 여러 층이

차례로 자리하고 있었다.

삽과 호미로 흙을 걷어내며 조사를 이어가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신석기층에 도달했을 땐 3주일의 조사 기간 가운데

절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평면을 깨끗하게 정리하자

집자리 윤곽이 열(列)을 이루며 확인됐다.

집자리는 네모난 것과 둥근 것이 있었고 서로 겹쳐

있는 것까지 합쳐 8기나 됐다.


집자리에 번호를 붙인 다음 내부 흙을 제거해 나갔다.

약 30cm 아래에서 기둥자리, 화덕자리가 확인됐고

곳곳에서 다량의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석기가

출토됐다. 빗살무늬토기는 대부분 아가리 쪽이 넓고

바닥이 뾰족한 포탄 모양이었고 석기 가운데는

그물추도 포함되어 있었다. '5500년 전 신석기 마을'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발굴은 1975년까지 세 차례 더 진행됐다.

첫해 발굴한 곳 주변에서 18기의 집자리를 더 찾아냈고 다량의 유물을 수습했다.

특히 불탄 집자리가 발굴되면서 신석기인들이 살았던 움집 구조를 복원해낼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였다.

움집을 짓고 빗살무늬토기를 쓰며 마을을 이룬 채 사는 모습 등 현재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신석기문화의 이미지는 대부분 이 유적 발굴 조사의 성과에서 말미암은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