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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이상 울분 느끼며 사는 한국인, 독일보다 6배 많다

바람아님 2019. 2. 19. 08:52


한겨레 2019.02.18. 15:16


자신의 가치나 기여 '무효 취급'받는 억울함 '울분' 만들어
심각한 경우 공격성 표출..폭력 휘두르거나 자살 시도키도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1.

백화점 판매직 노동자인 임아무개씨는 최근 매장에서 물건을 찾는 손님을 발견하고 “잠시만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가 욕설을 들었다. 손님은 “싸가지 없이 네가 뭔데 착석을 권유하냐”라고 말한 뒤 백화점 담당을 불렀다. 그리고 “이○이 ‘싸가지’ 없는 말투로 ‘고객님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했다”며 “내가 집에서도 스트레스를 받는데 여기서도 무시를 당해야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백화점 담당은 사과를 재촉했고, 임씨는 어떤 대목에서 ‘싸가지’가 없었는지도 모른 채 고개를 숙여야 했다. 억울함은 창고에서 우는 것으로 풀었다.


#2.

김아무개(45)씨는 지난해 8월27일 서울 광진구 구의동 자신의 집 오피스텔로 치킨을 배달시킨 뒤 배달 온 문아무개(19)씨를 쫓아가 흉기를 휘둘렀다. 문씨는 흉기에 목 뒷부분을 다쳤고, 흉기를 피하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오른쪽 정강이뼈와 종아리뼈가 부러졌다. 김씨는 이날 밤 10시8분께 치킨 배달을 온 문씨가 불친절하게 응대했다고 생각해 1시간쯤 뒤 다시 문씨를 지목해 배달을 요청한 뒤 이런 범행을 저질렀다. 김씨는 1심에서 살인미수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한국에서 중증도 이상의 울분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의 비율이 독일보다 약 6배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에서 지난해 12월 공개한 <한국 사회와 울분>이라는 제목의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 성인남녀 14.7%가 일상생활에서 장애를 일으킬 정도의 중증도 이상의 울분을 느끼면서 사는 거로 조사됐다. 독일은 2.5% 정도다.

한국 사회에서 중증 울분을 겪는 이들이 독일보다 6배가량 높은 것으로 나왔다. 유명순 교수 연구팀 제공.

연구팀은 성인남녀 2024명을 대상으로 ‘생각할 때마다 아주 화가 많이 나게 하는 일’, ‘내가 보기에 정의에 어긋나고 아주 불공정한 일’, ‘상대방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일’ 등 19가지 항목에 대해 질문하고 이에 대해 ‘전혀 없었다’(0점)부터 ‘아주 많이 있었다’(4점) 사이로 평가하게 해 울분장애를 측정했다.


특히 한국인들은 자신의 노력이 보람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무효 취급’을 받는데 따른 울분도가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들은 ‘때때로 나는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질문에는 66.7%가 동의했다. 그럼에도 동시에 ‘노력은 인정받지 못하지만 한 번의 실수는 즉각 비판받는다’는 항목에도 64.1%가 동의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나 기여를 평가해주지 않는 ‘무효 취급’을 받으면서 억울한 감정이 생기고, 이에 따른 울분이 커진다는 얘기다. 연구팀은 이를 ‘무효 사회’라고 개념화했다.

울분이 심해지면 ‘외상후 울분장애(PTED)’로 발전하기도 한다. 외상후 울분장애는 부정적인 사건을 경험한 뒤 정신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만성적 반응 장애다.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그 사건을 불공정하게 여기면서 무력감이나 절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질환이다. 특히 외상후 울분 장애를 겪은 이들은 현실이 공정하다는 믿음이 깨지면서 지속해서 울분을 호소하게 된다. 노력했어도 계속해서 직장을 구하기 어렵거나, 직장 내에서 부당하게 모욕과 따돌림을 당하거나, 사건·사고의 피해자가 됐지만 정부가 요구를 묵살할 때가 그 예이다. 울분이 만성화하면 소득 활동이 불가능한 심리상태에 이른다. 심각한 경우 공격성이 표출되며 폭력을 휘두르거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2012년 8월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 노상에서 당시 30살이던 남성이 흉기를 휘두른 범죄가 그 예이다. ㄱ씨는 2010년 1월 ㅎ신용평가정보원에 계약직으로 입사해 일하다 실적이 저조해 회사를 떠나게 됐다. 이후 대출 관련 회사에 취업했으나 2012년 4월 다시 퇴사했다. 월세 20만원 신림동 고시원에 살던 ㄱ씨는 4000만원의 빚이 생기고 말았다. 자살을 결심했지만 혼자 죽기는 억울하다고 생각해 이전 직장 앞으로 가서 흉기를 휘둘렀다. 이전 직장 동료 2명과 지나가는 사람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울분 장애를 겪는 집단은 ‘세상은 공정하게 돌아간다’거나 ‘세상은 나에게 공정하다’는 믿음이 다른 집단에 견줘 현격히 떨어졌다. 울분 장애를 겪는 이들은 한국 사회의 공정성에 대해 10점 만점에 3.6점을 줬다. 울분 장애를 겪지 않는 이들은 10점 만점에 4.4점을 줬다.


울분은 자신을 가난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더 큰 문제로 다가왔다. 울분 점수와 연관해 연관성이 가장 큰 정체성 요소는 응답자의 주관적 계층인식이다. 자신이 중산층·하위층에 속한다는 사람일수록 울분 장애 평균점수가 높았다. 일을 못 하고 있거나, 가구 소득이 낮을수록 울분 장애 점수가 높아지기도 했다. 울분 장애 평균점수는 하위층은 2.14점, 중산층은 1.60점, 상위층은 1.48점이었다.


연구를 맡은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사람들이 ‘무효 취급’을 받으면 ‘무력함’이 생기고 이는 부정적 시너지를 내며 울분 장애를 만든다”며 “울분에 근원에는 ‘무효 사회’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은 공정하며, 세상은 나를 공정하게 처우할 것이라고 믿는 ‘공정세계 신념’이 있다. 이를 위배하는 불공정, 불평등, 차별이 계속되어 그런 자기 신념이 깨지는 상황에 이르면 신뢰와 만족, 긍정적인 미래 전망 대신 굴욕, 억울함, 자신을 불공정하게 대우하고 불공평하게 처분한 기관이나 상대를 향한 외적 분노와 복수심이 치솟게 된다”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골 깊은 내적 쓰라림에 매몰되면 주변으로부터의 도움을 제때 적절히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이런 무력함이 추가로 결합하는 복합 감정, 그것이 울분”이라고 밝혔다. 그는 “울분은 파괴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분노를 넘어 혐오, 자책을 넘어 자기 파괴에 이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회 문제의 설명 변수이자 결과 지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규 기자 j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