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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의 영화 & 역사] 간교해진 술탄… 천년 '비잔틴' 제국 무너뜨리다

바람아님 2019. 2. 21. 19:57

(조선일보 2019.02.21 남정욱 작가)


'정복자 1453'


남정욱 작가남정욱 작가


밤의 이스탄불은 몽환적이다.

비라도 한 자락 뿌리면 신비로움이 더해져 지상의 땅이 아닌 듯 분위기가 오묘하다.

새벽의 이스탄불은 영성(靈性)의 도시다.

사방 수백 곳의 모스크에서 구슬픈 곡소리 같은 아잔이 흘러나오면 없던 종교적 심성이 생길 지경이다.

정작 한낮의 이스탄불은 어수선하다. 명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관광객들이 구경 다니기는

좋지만 성당과 모스크와 영묘들이 두서없이 펼쳐져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게 사람들이 이스탄불을 찾는 이유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는 많다. 파리, 로마, 아테네는 긴 역사의 호흡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지만

그래 봐야 결국 한 나라, 한 문명이다. 이스탄불은 바닥에는 그리스 문명이, 가운데는 라틴 문명이, 그리고 제일 위에는

튀르크 이슬람 문명이 쌓이고 뒤섞인 중첩의 공간이다.

관광 명소인 술탄 아흐메드 광장만 해도 비잔틴 제국의 성 소피아 성당과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아흐메드 자미(블루 모스크)가

대치하듯 마주 보고 있다. 세상 어느 도시에도 이런 풍경은 없다. 이 그림을 만들어 낸 남자가 오스만 제국의

7대 술탄이었던 메흐메트 2세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가 덜컥 은퇴 선언을 해 버리는 바람에 열두 살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야망은

능력을 따라가지 못했고 조급하다 보니 난폭하기 일쑤였다. 수박 도둑을 잡겠다고 시종 수십 명의 배를 가른 것은

사건 축에도 끼지 못한다. 사사건건 궁정의 재상들과 충돌했고 툭하면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이야 오스만 제국의 숙원 사업이긴 했지만 열두 살 어린아이가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군대는 그의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인 계획에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결국 폐위되어 시골로 쫓겨나는 걸로 사태는 마무리된다. 5년 뒤 메흐메트 2세는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술탄의 자리에 복귀한다. 왕위에 오르고 처음 한 게 이복동생을 교살한 일이다.

부왕(父王)의 미망인이자 이복동생의 어머니가 즉위를 축하하러 온 바로 그 시간이었다.

이런 메흐메트 2세의 등장에 콘스탄티노플은 바짝 긴장한다. 서유럽과 바티칸 역시 우려의 눈길로 상황을 바라보았지만

이들은 얼마 안 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메흐메트 2세는 부왕의 가신들을 대부분 유임시켰다.

심지어 자기를 쫓아내자고 아버지에게 간청했던 대재상도 그 자리에 그냥 두었다. 국내 정치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대외적으로도 유순했다. 부왕이 맺은 조약들을 그대로 승인했으며 코란에 손을 얹고 비잔틴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무능한 이 소년이 기독교 세계에 위협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제스처였다. 대재상을 그대로 둔 건 아무 때나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공손했던 것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할 동안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더욱 간교하고 신중해졌을 뿐이다. 1453년 4월 6일 오스만 제국의 공세가 시작되고 5월 29일 마침내

천년 왕국 콘스탄티노플이 역사에서 사라진다. 메흐메트 2세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대한 기록은 차고 넘친다. 세계 최대의 대포가 등장하고 산으로 배를 들어 옮기는 등

이만큼 흥미진진한 전투가 없다. 반면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서구의 입장에서는 패배의 기록을 굳이 영상으로까지

감상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2012년 개봉한 영화 '정복자 1453'은 그래서 특별하다.

오스만 제국의 후예인 터키에서 만들어졌고 덕분에 서구의 시각이 아닌 동양의 눈으로 메흐메트 2세와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바라볼 수 있어서다. 터키 영화다 보니 일부 왜곡은 당연히 따라온다.

콘스탄티노플의 마지막 황제는 탐욕스러운 멍청이로 등장한다. 그는 제국을 세운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가장 현명하고 정신이 올바른 군주였다. 방어전에서 맹활약을 했던 베네치아 해군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승자의 기록은 야박하다.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기독교의 흔적을 지웠다면 서구는 역사에서 메흐메트 2세의

흔적을 지웠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영토는 90만㎢로 독일과 프랑스를 합쳐놓은 규모다.

아들에게 물려줄 때는 220만㎢였다. 그의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이 끝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오스트리아의 빈과 로마에도 오스만의 깃발이 휘날렸을지 모르는 일이다.

정복 군주답게 그는 군사 원정 도중 사망했다. 마흔아홉 살의 나이였다. 




정복자 1453

파룩 악소이 감독/ 루커스/ 2015/ DVD 1매(156분)
DV688.2-13819/ [강서]디지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