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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국칼럼] 진짜 포용과 가짜 포용

바람아님 2019. 3. 30. 08:11

세계일보 2019.03.28. 21:12

 

적군의 선봉장인 청년 김구를 /
버선발로 맞은 안중근 아버지 /
풍전등화의 북핵 위기 앞에서 /
같은 국민에게 총구 들이대서야


적폐청산의 파열음이 요란한 요즘 뇌리에 떠오른 두 분이 있다. 백범 김구와 안중근 의사이다. 한때 총구를 맞댄 두 집안이 꽃다운 인연을 후대에까지 이어갔기 때문이다. 백범은 임시정부 피난 시절에도 안 의사 가족을 챙겼고, 해방 후에는 효창공원 맨 윗자리에 안중근 가묘를 만들었다. 안 의사 조카를 자신의 대외담당 비서로, 조카딸을 맏며느리로 삼았다.

         
백범과 안 의사는 처음엔 적대관계였다. 똑같이 황해도 해주 출신이었으나 신분부터 달랐다.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안 의사와는 달리 백범은 가난한 상민이었다. 차별의 설움이 사무친 청년 백범은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동학에 몸을 던졌다. 도력이 출중하다는 소문이 퍼져 수천명의 교도들이 그의 수하로 몰렸다.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뽑혀 해주성을 공격했으나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곧 동학군 소탕작전이 시작됐다. 토벌대의 수장은 안 의사 아버지인 안태훈 진사였다. 그는 사격 솜씨가 뛰어난 맏아들 중근을 앞세워 동학군 2000여명을 대파했다.
배연국 논설위원
쫓기던 백범에게 어느 날 밀사가 찾아왔다. 적장 안 진사가 보낸 사람이었다. “팔봉 접주가 아직 어린데도 대담한 인품을 지녔도다. 나는 그대를 토벌하지 않겠으나 혹여 그대가 나를 치려다 패하여 인재를 잃을까 우려스럽다.” 안 진사의 말을 전해 들은 백범은 참모회의를 거쳐 ‘서로 공격하지 않고 한쪽이 위기에 처하면 돕자’는 밀약을 맺는다.


얼마 후 동학군이 패망하자 백범은 안 진사 집으로 찾아가 몸을 숨겼다. 대를 이은 안 의사 집안과의 친교가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백범을 처음 만난 안 의사의 아버지는 “신변이 몹시 우려돼 수소문했으나 계신 곳을 모르던 터에 이렇게 찾아주시니 감사하오”라며 깍듯이 예우했다. 그는 집 한 채를 마련해 백범의 부모까지 모셔와 살게 했다. 토벌대의 수장이 열네 살이나 어린 적장을 버선발로 맞은 셈이다.


백범에게 안 진사는 탐관오리의 학정을 비호하는 적폐세력이나 다름없었다. 안 진사 입장에서도 백범은 나라에 모반을 일으킨 반란군의 수괴일 뿐이다. 둘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이였다. 스무 살의 백범은 무슨 심정으로 적폐의 심장부에 몸을 의탁했을까. 안 진사가 적의 장수를 숨겨주고 보살핀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방법은 달랐어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다는 대의가 서로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선 1%의 애국심만 있다면 상대가 누구든 힘을 합쳐야 한다는 포용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지키고 기릴 ‘진짜 포용’이 아니겠는가. 만약 두 집안이 끝까지 죽기로 싸웠다면 우리는 김구와 안중근, 두 독립영웅 중 한 분을 잃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입으로 포용을 외치면서 발은 딴 곳으로 향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나라의 존망을 가름할 핵무기 앞에서 자중지란을 부추긴다. 정치권에서 시작된 적폐청산의 불길은 사법부로 옮겨붙은 지 오래다. 함께 살아가는 국민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면서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진짜 적폐’에게는 버선발로 달려간다. 국가안보를 수렁에 빠뜨리는 ‘가짜 포용’임이 분명하다.


IMF 사태의 교훈을 벌써 잊었는가. 1997년 IMF 지원을 받기 전에 정부는 세계 각국에 도움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 손을 따듯이 잡아준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외환 부도에 앞서 일어난 ‘외교 부도’ 사태였다. 그것이 국가의 위기를 키웠음은 물론이다. 외교를 국내 정치에 이용한 값비싼 후과였다. 그런 일을 겪고도 외교와 안보를 정략의 제물로 삼는 구태가 지금도 반복된다. 일본의 과거를 헤집고 미국과는 파열음을 내면서 우리의 목줄을 죄는 북과만 화음을 맞춘다. 총으로 맞설 상대와 버선발로 맞을 상대가 뒤바뀐 꼴이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에 물유본말(物有本末)이란 말이 나온다. 모든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다는 뜻이다. 배의 위아래가 뒤집히면 침몰하듯이 포용의 대상이 뒤바뀌면 나라는 위험에 처한다. 위정자들의 정치 놀이터로 전락한 대한민국호의 안보 실상이 딱 그런 처지다.
 
배연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