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2019.03.28. 21:12
적폐청산의 파열음이 요란한 요즘 뇌리에 떠오른 두 분이 있다. 백범 김구와 안중근 의사이다. 한때 총구를 맞댄 두 집안이 꽃다운 인연을 후대에까지 이어갔기 때문이다. 백범은 임시정부 피난 시절에도 안 의사 가족을 챙겼고, 해방 후에는 효창공원 맨 윗자리에 안중근 가묘를 만들었다. 안 의사 조카를 자신의 대외담당 비서로, 조카딸을 맏며느리로 삼았다.
얼마 후 동학군이 패망하자 백범은 안 진사 집으로 찾아가 몸을 숨겼다. 대를 이은 안 의사 집안과의 친교가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백범을 처음 만난 안 의사의 아버지는 “신변이 몹시 우려돼 수소문했으나 계신 곳을 모르던 터에 이렇게 찾아주시니 감사하오”라며 깍듯이 예우했다. 그는 집 한 채를 마련해 백범의 부모까지 모셔와 살게 했다. 토벌대의 수장이 열네 살이나 어린 적장을 버선발로 맞은 셈이다.
오늘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입으로 포용을 외치면서 발은 딴 곳으로 향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나라의 존망을 가름할 핵무기 앞에서 자중지란을 부추긴다. 정치권에서 시작된 적폐청산의 불길은 사법부로 옮겨붙은 지 오래다. 함께 살아가는 국민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면서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진짜 적폐’에게는 버선발로 달려간다. 국가안보를 수렁에 빠뜨리는 ‘가짜 포용’임이 분명하다.
IMF 사태의 교훈을 벌써 잊었는가. 1997년 IMF 지원을 받기 전에 정부는 세계 각국에 도움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 손을 따듯이 잡아준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외환 부도에 앞서 일어난 ‘외교 부도’ 사태였다. 그것이 국가의 위기를 키웠음은 물론이다. 외교를 국내 정치에 이용한 값비싼 후과였다. 그런 일을 겪고도 외교와 안보를 정략의 제물로 삼는 구태가 지금도 반복된다. 일본의 과거를 헤집고 미국과는 파열음을 내면서 우리의 목줄을 죄는 북과만 화음을 맞춘다. 총으로 맞설 상대와 버선발로 맞을 상대가 뒤바뀐 꼴이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에 물유본말(物有本末)이란 말이 나온다. 모든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다는 뜻이다. 배의 위아래가 뒤집히면 침몰하듯이 포용의 대상이 뒤바뀌면 나라는 위험에 처한다. 위정자들의 정치 놀이터로 전락한 대한민국호의 안보 실상이 딱 그런 처지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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