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김기천 칼럼] 소득주도성장의 '족보'가 무슨 소용인가

바람아님 2019. 4. 10. 09:25

조선비즈 2019.04.09. 06:01


조선 시대 최고 베스트셀러는 ‘족보’라고 한다. 일제 시대인 1920년대에 도서 출판·판매에서 부동의 1위는 족보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특이한 현상이다. 족보에 대한 한국인의 유별난 집착을 보여준다.

하지만 족보 기록의 신뢰도는 매우 낮다는 게 학자들의 평가다. 역사학자인 박홍갑씨는 17세기까지만 해도 족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10% 남짓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족보 발간이 크게 늘어나면서 환부역조(換父易祖)같은 위조가 성행했다고 한다.


한국의 족보는 원산지인 중국과도 크게 다르다. 중국에선 평범한 인물도 시조로 추대된다. 한국에선 유명한 인물만이 시조가 될 수 있었다. 신라·가야의 왕이거나 높은 벼슬아치 또는 중국의 명문가 출신이 대부분이다. 한국의 족보를 보면 고구려·백제인을 포함해 보통 사람의 99% 이상은 후손을 전혀 남기지 못한 듯하다. 물론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한국인들은 족보를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일제 시대에 족보를 지키기 위해 산 속의 바위를 깎아내고 그 속에 몰래 보관한 흔적이 전국 여러 곳에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르겠지만 유난스레 족보를 따지는 게 한국 사회의 병폐다. 족보를 내세워 뼈대 있는 가문으로 행세하려는 과시적 욕망이 두드러진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소득주도성장은 세계적으로 족보가 있는 이야기"라고 했다. "원래 ILO(국제노동기구)가 오래전부터 임금주도성장을 주창했다"며 "ILO의 임금주도성장을 많은 나라들이 받아들여 최저임금 제도를 새로 마련하거나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했다"고도 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듣보잡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데 대한 반론으로 들린다. 실제 이 정부 출범 초기 어느 경제학 교수는 "동료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득주도성장이 무슨 이야기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면 뉴스를 통해 처음 들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라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세상에 족보 없는 이론이나 정책은 없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서양 속담도 있다. 소득주도성장론을 듣도 보도 못했다는 반응은 국내 경제학계의 ‘지적인 편식’ 탓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 중심의 주류 경제학에 경도돼 시야가 좁다는 지적이 많다. 그렇다 해도 소득주도성장의 타당성을 설득하기 위해 족보를 내세워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대통령이 언급한 ILO의 성장론은 2012년에 나온 ‘임금주도성장:개념, 이론, 정책’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가리킨다. 불과 7년전 논문을 가지고 족보운운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더욱이 한국의 소득주도성장론은 ILO의 임금주도성장론을 변형한 것이다. 갓 태어난 신생아나 다름 없다. 대부분 경제학자들이 생소하게 느끼는 게 당연하다.


임금주도성장의 뿌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폴란드 출신 경제학자인 미하우 칼레츠키가 나온다. 케인스와 동시대 학자인 칼레츠키는 1935년 논문에서 임금이 하락하면 고용이 늘어난다는 통념을 반박했다. 임금 삭감은 당시 세계 경제의 현안이었던 불황과 실업의 해법이 아니라고 했다. 이윤이 증가해도 미래 수익성이 불확실하면 자본가들이 곧바로 투자에 나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임금을 깎으면 안된다는 칼레츠키의 주장과 정부가 개입해 저소득층의 소득을 늘리면 경제가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소득주도성장론은 상당한 거리가 있다. 다만 칼레츠키가 선도한 포스트 케인지언 학파의 이론적 흐름이 ILO의 임금주도성장론으로 이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족보 있는 이론이라고 큰 소리 칠 정도는 아니다.


임금주도성장은 경제학계의 비주류에 속하는 소수 학자들의 이론이다. 아직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독일이 2016년에 최저임금제를 처음 시행하고, 미국 등 여러 나라가 최저임금 인상에 나서고 있는 게 임금주도성장론을 받아들인 결과라는 설명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


주류 경제학에서도 최저임금의 긍정적 효과에 대한 연구가 적지 않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장을 역임했고, 얼마전 타계한 앨런 크루거 교수가 대표적인 학자다. 크루거는 1990년대 초반 실증연구를 통해 최저임금을 서서히 올릴 경우 고용에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주장했다.


하지만 경제학자 중에 2년간 30%나 최저임금을 올려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사람은 없다. 심지어 임금주도성장론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ILO 논문에는 수출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임금주도성장이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대목도 있다. 정책이 먹히지 않아도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만들어놓았다.


문재인 정부가 대책 없이 사고를 치고는 뒷수습에 허덕대면서 그래도 소득주도성장이 옳다고 우기는 것은 아집이고 독선이다. 당연히 해야 할 속도 조절과 보완을 가지고 애초 잘못된 정책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이제 와서 족보같지 않은 족보를 내세워봐야 최소한의 변명도 되지 않는다. "개족보도 족보냐"는 신랄한 반응까지 나왔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