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만물상] 코미디언 대통령

바람아님 2019. 4. 23. 10:04

(조선일보 2019.04.23 임민혁 논설위원)


'농담 아님(No joke).' 로이터통신은 2015년 과테말라 대선에서 정치 경험이 전무(全無)한 코미디언 모랄레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 제목을 달았다. 선거 과정에서 정치 명문가 출신인 상대 후보가 "국정(國政)이 코미디냐"고 공격하자,

모랄레스는 "나는 사람들을 웃겨왔고 대통령이 된다면 국민을 울게 하진 않을 것"이라고 받아쳤다.

그는 배 넘는 득표로 압승했다.


▶코미디언이 정치권력을 잡았다는 소식은 세계 곳곳에서 심심찮게 들려온다.

지난해 슬로베니아에선 '성대모사 정치 풍자쇼'로 인기를 끈 인물이 최연소 총리로 당선됐다.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도 코미디언을 시장으로 뽑았다.

일본에서는 보수 성향으로 알려진 미야자키현에서 행정 경험도 없고 정당과도 무관한 코미디 배우가 지사로 뽑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 외교전문지는 '머지않아 코미디언이 세상을 지배하리라' 하고 풍자 글을 실었다.

[만물상] 코미디언 대통령


▶엊그제 우크라이나에서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다.

마흔한 살 정치 신인 젤렌스키는 TV 코미디 시리즈로 큰 인기를 끈 인물이다.

그는 평범한 교사가 정치에 뛰어들어 대통령이 되는 드라마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국민 코미디언' 반열에 올랐다.

그러더니 드라마 제목에서 이름을 딴 당을 만들고 작년 말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이어 현직 대통령, 그리고 '오렌지 혁명'을 이끌었던 전 총리 같은 거물들을 제치고 기어코 드라마를 현실로 만들었다.


▶이번 우크라이나 대선은 여러모로 코미디적 요소가 많았다.

"대통령의 부인이 되고 싶나요" 같은 구호를 걸고 공개 구혼에 나선 후보도 있었고,

한 군소 후보는 유력 후보와 똑같은 성(姓)으로 후보 등록을 해 유권자를 헷갈리게 했다.

붕괴 직전의 경제, 만연한 부패, 무력 분쟁으로 삶과 현실에 지친 국민이 기성 정치인에게 무조건 등을 돌리면서

나온 현상이라고 한다.


정치 엘리트층에 대한 반감과 포퓰리즘이 정치와 코미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잠시 국회의원으로 외도했던 '코미디 황제' 이주일이 여의도를 떠나면서 말했다.

"국회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이 많다."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코미디언이 정치도 잘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치와 국정은 코미디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다.

중국 사람들은 "이래서 대중 선거는 안 된다"고 한다.

 젤렌스키도 그 앞에 놓인 현실은 결코 코믹하지 않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