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9.09.03. 정민 한양대교수·고전문학)
중국에 사신 갔던 신위(申緯)가 돌아왔다. 휘장을 친 수레 하나가 따라왔다. 가족과 친지들은 입이 그만 귀에 걸렸다. 휘장을 걷자 온통 돌뿐이었다. 그 무거운 괴석을 싣고 만주벌을 건너왔던 것이다. 자신은 그것을 자랑으로 여겨 화공을 불러 재석도(載石圖), 즉 돌 싣고 오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추사가 <청나라 문인 호경(胡敬)의> '수선화부(水仙花賦)'를 글씨로 쓰는 등 수선화 예찬론을 펼치면서, 중국에서 수선화 구근을 수입해 오는 것도 한때 크게 유행했다. 수반에 구근을 얹어 겨울철 방 안에서 수선화 향기 맡는 것을 사대부의 고아한 풍류로 여겼다. 나중에는 정도가 너무 심해져서 국가에서 수입을 금지시켰다.
다산은 사신으로 연경에 가는 이기양(李基讓)을 전송하는 글에서, 중국에 간 우리나라 사신들이 그 비싼 은을 가져가서 금방 닳아 없어지고 말 비단이나 각종 소비재만 잔뜩 사올 뿐, 백성들의 실용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하나라도 구해가지고 오는 사람을 못 보았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고려 때 문익점(文益漸)이 목화씨를 얻어 돌아온 일을 말했다. 실 잣는 기계 틀을 '물레'라고 하는데, 문익점이 가져왔다는 뜻의 '문래(文來)'에서 나왔다고도 했다.
이기양은 다산의 이 말을 듣고 북경에서 목화를 앗는 기계인 박면교거(剝綿攪車)를 구해왔다. 나사 홈을 판 축 끝에 십자 기어를 맞물려 그 아래에 가로로 나무를 걸어 만든 기계장치다. 의자에 앉아 발판을 밟으면 하루에 200근의 목화를 앗을 수 있었다. 200근은 젊은 여자가 20일 꼬박 매달려야 겨우 마칠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 정조가 기뻐하여 그대로 본떠 만들어서 팔도에 나눠주게 했다.
다산은 이기양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이 기계를 이용해 장사하는 사람이 4000근의 목화를 앗아 1000근으로 만든다면 운송 비용도 4분의 3이 절감될 테니 이익이 얼마나 크냐면서, 그 공이 문익점이 목화씨 가져온 것 이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이 중국에 갔는데, 한 사람은 돌이나 수선화 뿌리를 사오고, 한 사람은 목화씨 앗는 기계를 구해왔다. 그 해맑은 운치가 귀하고, 값비싼 비단만 잔뜩 사온 것보다야 낫다 해도, 목화씨 앗는 기계가 가져온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보람에 견줄 수야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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