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매일신문 2009.10.10. 문무학 시조시인 · 경일대 초빙교수)
한 자 쓰고 눈물지고 - 무명씨
한 자 쓰고 눈물지고 두 자 쓰고 한숨지니
자자행행(字字行行)이 수묵 산수 되거구나
저 님아 울며 쓴 편지니 휴지 삼아 보시소.
“한 자를 쓰고 눈물 짓고, 두 자를 쓰고 한숨 지니/ 글자마다 줄마다 눈물에 젖어 수묵으로 그린 산수화가 되어버리고 마는구나/ 님이여! 울면서 쓴 편지라 그러니 버리는 종이삼아서라도 보아주소서.” 로 풀리는 작품이다. 울면서 쓴 편지, 필기구가 눈물을 떨군다 해도 번지지 않는 것들로 바뀐 요즘에사 경험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붓으로 편지를 썼을 적이나, 펜을 잉크에 찍어 썼던 시절엔 누구라도 경험했음직한 일이다.
편지를 쓰며 떨군 눈물방울에 먹물이 번져 산수화처럼 되어 읽기가 어렵겠지마는 울며 쓴 편지니까 그런대로 보아달라는 것인데, 이런 편지가 깨끗이 쓴 편지보다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얼마나 정감이 넘치고 애틋한가. 화려한 종이에 내용 없는, 혹은 진실이 전해지지 않는 편지와는 비교할 수 없으리라.
이런 편지를 받은 사람은 어떨까? 틀림없이 감동을 받을 것이다. 그리곤 그도 울면서 편지를 쓰고 답장을 보냈으리라. 그리하여 설사 이별을 통보했던 사랑이라도 다시 만나 사랑을 하게 됐으리라. 임의 눈물이 번져난 편지를 받고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으랴. 눈물로 쓴 편지를 보내면서 또 읽기 어려울까 걱정하는 마음까지 담아놓았으니 얼마나 절절한가.
편지로 이런 사랑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 시로 간절한 마음을 새겨놓을 수 있는 것, 참 원론적인 말이지만 글자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을 제치고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것도 바로 말과 글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 말로 할 수 없는 심정도 글로선 가능하기도 하고, 글로서만 불가능한 것은 시라는 예술의 형식을 통해서 가능해지기도 한다.
우리 민족은 우리만의 글자를 가진 문화민족이다.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홅배 이셔도 마참내 제 뜨들 시러 펴디 못하노미 하니라. 내 이를 어엿비 여겨 새로 스믈여덟자를 맹가노니”의 큰 뜻이 담긴 한글이다. 한글이 있어서 IT강국이 될 수 있었고, 땅덩어리 작아도 세계의 주요국가가 되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자랑스러운 우리 한글로…. 어제가 563돌의 한글날이었다.
<<가슴이 답답한 일이 쌓였을 때 읽을만한 또다른 시>>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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