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매일신문 2009.06.27. 문무학 시조시인·경일대 초빙교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
큰 잔에 가득 부어 취하도록 먹으면서
만고 영웅(萬古英雄)을 손꼽아 헤어보니
아마도 유령(劉伶) 이백(李白)이 내 벗인가 하노라.
살아가면서 "내 진정한 친구는 누구인가"라고 한두 번쯤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 없을 것이다. "좋은 친구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잘 산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단 한 사람의 고귀한 친구조차도 갖지 못한 사람은 사는 값어치가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했다. 삶에서 친구는 정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이 작품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이 읊었다. 조선의 선비였고 조선 왕조 500년 동안 31세에 대제학이 된 사람은 한음뿐이기도 하다. 그는 그만큼 유능했고, 유명한 선비였다. 무엇보다도 '한음'하면 이어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바로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한음과 오성의 우정은 위인전으로 전하기도 한다. 그런 그가 유령과 이백이 내 벗이라고 읊은 것을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술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읊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술과 관련해서는 유령과 이백을 절대 지나칠 수 없다. 유령은 술 마시는 일 말고는 한 일이 없는 사람, 세상에 남긴 것은 오로지 술의 덕을 찬양한 '주덕송'(酒德頌) 하나뿐이다. '머물러 있으면 크고 작은 술잔을 잡았고, 활동하면 술통과 술병을 꺼내니'라고 읊었을 정도이다. 이백, 그는 또 어떤가. '장진주'에서 '모름지기 한 번 술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라고 했다. 그야말로 술의 만고영웅들이다.
한음도 술을 마시며 그런 주객 속에 끼이고 싶었을까.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마시면서 만고의 영웅을 손꼽다가 대작할 벗으로 유령과 이백을 떠올린 것이 참 통쾌하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도 그 기분은 이해가 갈 것 같다.
'술'이란 낱말이 '예술'의 준말이라는 궤변론자가 있기도 한데, 그게 턱도 없는 말이 아닐 듯싶기도 하다. 최근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막걸리, 잔이 아닌 사발로 들이키면서 소중한 친구의 이름 한번 불러보자. 부를 친구가 없다면 가슴을 치면서 통곡이라도 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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