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 2019년 06월 18일(火)
■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 - (33) 로마의 성매매
인구 1만5000명 시골 폼페이에
세금내는 성매매업소 영업 흔적
업소 들어서면 ‘생식의 신’그림
방엔 가격별 ‘체위 음화’ 그려져
욕정 주체 못한 황후 메살리나
황제 두고 딴 남자와 결혼까지
로마 속주 모로코 볼루빌리스도
폼페이와 비슷한 ‘성기 광고판’
터키 로마 유적지 에페소스엔
발바닥모양 간판…성인만 입장
“부인은 남편을 하녀들 쫓아다니는 난봉꾼이라 부르는데, 그녀도 가마꾼들 뒤를 맨날 쫓아다니네.” 프랑스의 로마 사학자 제롬 카르코피노가 쓴 ‘고대 로마의 일상생활(Rome a l’apogee de l’Empire: la vie quotidienne, 우물이 있는 집, 류재화 옮김) 209쪽에 나오는 글귀다. 남녀 가릴 것 없이 향락에 빠진 로마의 일상을 떠올려 준다. 카르코피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덧붙인다. “묘지 뒤편 고샅길마다 ‘암컷 늑대’들의 매춘이 성행했다.” 마을 골목에서 여인들 매춘이 흔했다는 얘기다.
버닝썬 사태에 연루된 모 연예인의 해외 투자자 성매매 접대 의혹 사건이 이슈로 등장하더니, 전 법무부 차관의 성관련 추문 의혹이 지면을 장식하고, 마침내 모 언론사 사주의 성매매 일탈 의혹이 방송 탐사보도의 전파를 탔다. 최근 우리 사회 성매매 의혹 사건이 꼬리를 문다.
미국 시인 애드거 앨런 포는 1845년 ‘헬레네에게(To Helen)’라는 제목의 3연으로 된 개작시 2연에서 “영광은 그리스의 것이요, 위대함은 로마의 것(To the glory that was Greece, And the grandeur that was Rome)”이라고 읊조린다. 어느 문명권도 따라잡을 수 없는 ‘위대한(?)’ 로마의 성매매 풍속도를 들여다본다.
◇황후도 매춘부로 나섰던 로마
‘로마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1776∼1788년 6권)’를 쓴 영국의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의 4대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41∼54년)를 치켜세운다. 클라우디우스는 소아마비를 앓고, 음주벽에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하지만, 조카인 칼리굴라 황제가 암살된 뒤, 뜻하지 않게 쉰 살 늦깎이로 황제 자리에 오른다. 클라우디우스는 한국판 흥선 대원군이었다. 치열한 권력 다툼의 세계에서는 파락호로 권력자를 안심시키는 것이 보신의 상책이다. 클라우디우스는 권력을 잡자마자 산적한 난제들을 해결하며 영국을 정복해 속주로 삼는다. 하지만 이 유능한 황제가 해결하지 못한 난제가 있었으니….
황제가 되던 해 들인 손녀뻘 16세 황후 메살리나의 바람기다.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브리타니쿠스와 딸 옥타비아를 낳아준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넘쳐나는 욕정을 주체할 길이 없었던 모양이다. 50대 후반의 황제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염문도 모자라 특단의 욕구해소대책을 찾는다. 그게… 카르코피노가 언급한 ‘고샅길 암컷 늑대’가 되는 거였다. 밤이면 거리로 나와 난봉꾼들을 만나는데, 글쎄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거친 남자들만 받았다. 황후의 목적은 화대가 아니었으니, 강한 자극만을 찾았던 거다. 마약처럼 말이다. 결국 메살리나는 황제를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가 27세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전원도시 폼페이, 성매매 풍속도 간직
전성기 때 인구 100만 명을 넘던 제국 심장부 로마는 오늘날 당시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전차 경주장 히포드롬이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황실 묘지이던 산탄젤로 같은 초대형 유적과 공공생활(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포럼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머지 민간 구역은 땅에 묻혔다. 매춘문화를 정치와 종교 중심지에서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폼페이에서 답이 기다린다. 79년 베수비오 화산 대폭발 때 쏟아져 나온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돌덩이에 5∼10m 높이로 묻힌 폼페이는 흔적도 없이 땅 아래로 사라졌다.
1700여 년 세월이 흐르고 1748년 나폴리 왕국을 지배하던 프랑스 부르봉 왕실은 운하 건설과정에 소재가 드러난 폼페이 발굴의 첫 삽을 뜬다. 약탈에 가까운 또 한 번의 파괴 속에 발굴된 유물 상당수가 프랑스로 옮겨졌다. 오늘날 루브르에 폼페이 유물이 다수 전시된 이유다. 폼페이 면적의 75%가량만 발굴된 상태고, 현재도 지속된다. 폼페이는 로마와 멀리 떨어진 시골 전원도시인 동시에 상업 항구 도시다. 인구 1만5000명의 휴양도시인 만큼 각종 유흥시설도 갖춰져 있었을까?
◇대로변에 설치한 ‘남근 내비게이션’
방학이면 폼페이는 한국 단체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폼페이를 구석구석 충분히 음미하려면 아무리 서둘러도 하루가 걸린다. 하지만, 단체관광은 대개 2시간여 핵심 유적만 돌다 나온다. 바쁜 패키지 일정이라는 게 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만, 아쉬움이 크다. 폼페이 성매매 업소는 2군데다. 하나는 성문 입구에 붙어 있고, 다른 하나는 시내 한복판 뒷골목에 자리한다. 시내 중심가 성매매 업소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단체관광이야 가이드가 데려가지만, 시곗바늘을 2000년 전으로 돌려도 큰 어려움은 없다. 로마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다. 돈 버는 일이라면 다양한 아이디어가 허용됐고, 도덕적 잣대는 뒷전으로 밀렸다. 왜일까? 정부는 세금을 거둬 재정을 불렸기 때문이다. 폼페이 성매매 업소는 공창(公娼)은 아니지만, 정식으로 세금을 내는 업소였다. 로마 도시는 시민들이 모여 공적인 일도 보고, 물건을 사고파는 공공장소 포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폼페이도 마찬가지다. 포럼 옆으로 가장 번화한 도로가 나 있고, 매매업소는 인도에 간판을 달았다. 어떻게? 남근을 커다랗게 바닥에 새겼다. 남근 앞쪽이 가리키는 곳에 업소와 여인들이 기다린다. 남근 내비게이션인 셈이다.
◇업소 입구에 ‘생식의 신’ 프리아포스
골목을 찾아 들어가면 이층 발코니가 툭 삐져나온 업소에 이른다. 눈에 확 띈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꽉 차 있는 경우가 많다. 시간대를 잘못 맞추면 한참을 기다리다 떠밀리듯 보고 나온다. 로마 시절에도 이렇게 성황을 이뤘을지 궁금하지만 그런 기록은 없다. 입구에 특이한 그림 한 점이 걸렸다. 거대한 남근을 뻗치고 선 남성. 그리스 신화에서 풍요와 생식을 상징하는 신 프리아포스다. 미의 여신이자 성매매 종사 여성들의 수호신인 아프로디테가 연인이던 아레스 혹은 가끔 바람피우는 사이이던 헤르메스와 관계해 낳은 아들이란다. 풍년 농사는 물론, 자손 번창, 집안 번영을 기원하며 여염집 대문에 붙이기도 하는 일종의 부적이다. 더구나 성매매 업소이다 보니 이보다 더 적합한 수호신은 없다. 건물로 들어서면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정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방에는 돌로 만든 침대가 붙박이로 설치됐다. 침대가 생각보다 작다. 고대인들의 체격이 그리 크지 않았음을 눈치챈다. 지금은 돌침대지만 영업 당시에는 푹신한 쿠션을 깔았다.
◇체위별로 그림 그려놓고 가격 받아
방 입구는 물론 방 벽에도 음화가 그려졌다. 음화는 다양한 형태의 체위를 보여준다. 로마와 숙적이던 이란 땅 파르티아 제국에서 들어온 외래 유입 체위도 보인다. 여성이 말 타는 자세로 앞에 앉고 그 뒤에 남자가 눕는 여성 상위다.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펼치는 중에도 적국의 성문화를 적극 수용했던 로마의 열린(?) 문화관이 이채롭다. 로마인들은 종교도 그랬다. 페르시아의 종교인 미트라 신앙이나 이집트의 이시스 신앙을 받아들였다. 유대인의 기독교도 이방인의 종교이기는 마찬가지다.
벽에 그려진 체위는 단순히 고객의 취향만 고려한 서비스 차원이 아니다. 그림에 나오는 체위별로 가격을 달리 받았다. 업소에서 일하는 여인들은 천차만별이었다. 나이 든 여성, 젊은 여성, 외국인, 내국인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폼페이를 환락의 도시로만 여기면 곤란하다. 휴양도시로서 공부와 사색을 즐기는 인물도 살았다. 이탈리아 출신 저널리스트이자 문필가인 인드로 몬타넬리가 1959년 출간한 ‘벌거벗은 로마사(Storia di Roma, 풀빛, 박광순 옮김)’ 77쪽에는 폼페이에 무려 5000권의 그리스문자와 라틴문자로 된 책을 갖춘 저택이 있었다고 적는다. 향락과 학문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이는 에페소스 업소에서 다시 살펴본다.
◇모로코 로마도시에도 ‘남근 간판’
북아프리카 서쪽 대서양과 접한 모로코로 가보자. 고대 모로코는 마우레타니아로 불리며 로마의 협력국가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마우레타니아 왕 유바 2세에게 시집갔다. 39년 로마 폭군 칼리굴라는 유바 2세를 처형하고 마우레타니아를 로마 속주로 삼는다. 당시 마우레타니아 수도였고 이후 로마도시로 변한 볼루빌리스에는 지금도 개선문과 성벽을 비롯해 로마시대 유적이 남아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구릉 산지에 펼쳐진 로마 거리 한복판에 낯익은 유물 하나가 탐방객을 맞는다. 폼페이에서 보던 남근 내비게이션. 폼페이 것보다 더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디자인이 웃음을 자아낸다. 성매매 업소가 제국 내 곳곳에서 유행했고 영업이나 광고방식이 비슷했음을 보여준다.
◇터키 에페소스의 발바닥 19금 안내판
무대를 터키 최대의 그리스 로마 유적지, 에페소스로 옮겨보자. 2개의 입구 가운데, 항구 유적길 입구로 들어가면 산 중턱에 거대한 그리스식 극장부터 보인다. 여기서 중앙 도로를 따라 아름다운 건축양식의 켈수스 도서관까지 걷다 보면 도로 중앙에 특이한 안내 광고판을 만난다. 발바닥을 그려 놓았다. 무엇일까? 발 방향으로 가면 성매매 업소가 나오는데, 발이 이보다 큰 어른만 입장할 수 있다는 광고 겸 19금 안내판이다.
에페소스 성매매 업소는 많이 훼손돼 폼페이처럼 그 실상을 정확히 들여다보기 어렵다. 하지만, 폼페이와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지식의 보고이자 학문의 전당이던 켈수스 도서관과 길 하나로 마주 보고 섰다. 켈수스는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 총독이었는데, 아들이 아버지 납골묘를 겸해 도서관을 지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길을 가로질러 건너편 성매매 업소로 갔을까? 그러자면 주변의 이목도 있고…길 아래로 지하통로를 설치해 체면 구길 일이 없도록 해줬다. 학문과 향락의 간극이 폼페이보다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폭군 네로의 스승이자 금욕주의적 스토아 철학자였지만 돈을 무척 밝혔던 세네카는 당시 성 풍속도를 이렇게 풍자한다. “결혼하기 위해 이혼하고, 이혼하기 위해 결혼한다.” (문화일보 2019년 5월 21일자 22면 32 회 참조)
글·사진 = 김문환 문명사 저술가·세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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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 - (33) 로마의 성매매
인구 1만5000명 시골 폼페이에
세금내는 성매매업소 영업 흔적
업소 들어서면 ‘생식의 신’그림
방엔 가격별 ‘체위 음화’ 그려져
욕정 주체 못한 황후 메살리나
황제 두고 딴 남자와 결혼까지
로마 속주 모로코 볼루빌리스도
폼페이와 비슷한 ‘성기 광고판’
터키 로마 유적지 에페소스엔
발바닥모양 간판…성인만 입장
“부인은 남편을 하녀들 쫓아다니는 난봉꾼이라 부르는데, 그녀도 가마꾼들 뒤를 맨날 쫓아다니네.” 프랑스의 로마 사학자 제롬 카르코피노가 쓴 ‘고대 로마의 일상생활(Rome a l’apogee de l’Empire: la vie quotidienne, 우물이 있는 집, 류재화 옮김) 209쪽에 나오는 글귀다. 남녀 가릴 것 없이 향락에 빠진 로마의 일상을 떠올려 준다. 카르코피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덧붙인다. “묘지 뒤편 고샅길마다 ‘암컷 늑대’들의 매춘이 성행했다.” 마을 골목에서 여인들 매춘이 흔했다는 얘기다.
버닝썬 사태에 연루된 모 연예인의 해외 투자자 성매매 접대 의혹 사건이 이슈로 등장하더니, 전 법무부 차관의 성관련 추문 의혹이 지면을 장식하고, 마침내 모 언론사 사주의 성매매 일탈 의혹이 방송 탐사보도의 전파를 탔다. 최근 우리 사회 성매매 의혹 사건이 꼬리를 문다.
미국 시인 애드거 앨런 포는 1845년 ‘헬레네에게(To Helen)’라는 제목의 3연으로 된 개작시 2연에서 “영광은 그리스의 것이요, 위대함은 로마의 것(To the glory that was Greece, And the grandeur that was Rome)”이라고 읊조린다. 어느 문명권도 따라잡을 수 없는 ‘위대한(?)’ 로마의 성매매 풍속도를 들여다본다.
◇황후도 매춘부로 나섰던 로마
‘로마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1776∼1788년 6권)’를 쓴 영국의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의 4대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41∼54년)를 치켜세운다. 클라우디우스는 소아마비를 앓고, 음주벽에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하지만, 조카인 칼리굴라 황제가 암살된 뒤, 뜻하지 않게 쉰 살 늦깎이로 황제 자리에 오른다. 클라우디우스는 한국판 흥선 대원군이었다. 치열한 권력 다툼의 세계에서는 파락호로 권력자를 안심시키는 것이 보신의 상책이다. 클라우디우스는 권력을 잡자마자 산적한 난제들을 해결하며 영국을 정복해 속주로 삼는다. 하지만 이 유능한 황제가 해결하지 못한 난제가 있었으니….
황제가 되던 해 들인 손녀뻘 16세 황후 메살리나의 바람기다.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브리타니쿠스와 딸 옥타비아를 낳아준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넘쳐나는 욕정을 주체할 길이 없었던 모양이다. 50대 후반의 황제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염문도 모자라 특단의 욕구해소대책을 찾는다. 그게… 카르코피노가 언급한 ‘고샅길 암컷 늑대’가 되는 거였다. 밤이면 거리로 나와 난봉꾼들을 만나는데, 글쎄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거친 남자들만 받았다. 황후의 목적은 화대가 아니었으니, 강한 자극만을 찾았던 거다. 마약처럼 말이다. 결국 메살리나는 황제를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가 27세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 성매매 업소 내부에 그려놓은 프레스코. 다양한 그림을 그려놓고 요금을 달리 받았다. |
▲ 생식과 번영을 상징하는 그리스신. 성매매 업소 입구에 그렸다. |
◇전원도시 폼페이, 성매매 풍속도 간직
전성기 때 인구 100만 명을 넘던 제국 심장부 로마는 오늘날 당시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전차 경주장 히포드롬이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황실 묘지이던 산탄젤로 같은 초대형 유적과 공공생활(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포럼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머지 민간 구역은 땅에 묻혔다. 매춘문화를 정치와 종교 중심지에서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폼페이에서 답이 기다린다. 79년 베수비오 화산 대폭발 때 쏟아져 나온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돌덩이에 5∼10m 높이로 묻힌 폼페이는 흔적도 없이 땅 아래로 사라졌다.
1700여 년 세월이 흐르고 1748년 나폴리 왕국을 지배하던 프랑스 부르봉 왕실은 운하 건설과정에 소재가 드러난 폼페이 발굴의 첫 삽을 뜬다. 약탈에 가까운 또 한 번의 파괴 속에 발굴된 유물 상당수가 프랑스로 옮겨졌다. 오늘날 루브르에 폼페이 유물이 다수 전시된 이유다. 폼페이 면적의 75%가량만 발굴된 상태고, 현재도 지속된다. 폼페이는 로마와 멀리 떨어진 시골 전원도시인 동시에 상업 항구 도시다. 인구 1만5000명의 휴양도시인 만큼 각종 유흥시설도 갖춰져 있었을까?
◇대로변에 설치한 ‘남근 내비게이션’
방학이면 폼페이는 한국 단체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폼페이를 구석구석 충분히 음미하려면 아무리 서둘러도 하루가 걸린다. 하지만, 단체관광은 대개 2시간여 핵심 유적만 돌다 나온다. 바쁜 패키지 일정이라는 게 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만, 아쉬움이 크다. 폼페이 성매매 업소는 2군데다. 하나는 성문 입구에 붙어 있고, 다른 하나는 시내 한복판 뒷골목에 자리한다. 시내 중심가 성매매 업소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단체관광이야 가이드가 데려가지만, 시곗바늘을 2000년 전으로 돌려도 큰 어려움은 없다. 로마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다. 돈 버는 일이라면 다양한 아이디어가 허용됐고, 도덕적 잣대는 뒷전으로 밀렸다. 왜일까? 정부는 세금을 거둬 재정을 불렸기 때문이다. 폼페이 성매매 업소는 공창(公娼)은 아니지만, 정식으로 세금을 내는 업소였다. 로마 도시는 시민들이 모여 공적인 일도 보고, 물건을 사고파는 공공장소 포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폼페이도 마찬가지다. 포럼 옆으로 가장 번화한 도로가 나 있고, 매매업소는 인도에 간판을 달았다. 어떻게? 남근을 커다랗게 바닥에 새겼다. 남근 앞쪽이 가리키는 곳에 업소와 여인들이 기다린다. 남근 내비게이션인 셈이다.
◇업소 입구에 ‘생식의 신’ 프리아포스
골목을 찾아 들어가면 이층 발코니가 툭 삐져나온 업소에 이른다. 눈에 확 띈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꽉 차 있는 경우가 많다. 시간대를 잘못 맞추면 한참을 기다리다 떠밀리듯 보고 나온다. 로마 시절에도 이렇게 성황을 이뤘을지 궁금하지만 그런 기록은 없다. 입구에 특이한 그림 한 점이 걸렸다. 거대한 남근을 뻗치고 선 남성. 그리스 신화에서 풍요와 생식을 상징하는 신 프리아포스다. 미의 여신이자 성매매 종사 여성들의 수호신인 아프로디테가 연인이던 아레스 혹은 가끔 바람피우는 사이이던 헤르메스와 관계해 낳은 아들이란다. 풍년 농사는 물론, 자손 번창, 집안 번영을 기원하며 여염집 대문에 붙이기도 하는 일종의 부적이다. 더구나 성매매 업소이다 보니 이보다 더 적합한 수호신은 없다. 건물로 들어서면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정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방에는 돌로 만든 침대가 붙박이로 설치됐다. 침대가 생각보다 작다. 고대인들의 체격이 그리 크지 않았음을 눈치챈다. 지금은 돌침대지만 영업 당시에는 푹신한 쿠션을 깔았다.
◇체위별로 그림 그려놓고 가격 받아
방 입구는 물론 방 벽에도 음화가 그려졌다. 음화는 다양한 형태의 체위를 보여준다. 로마와 숙적이던 이란 땅 파르티아 제국에서 들어온 외래 유입 체위도 보인다. 여성이 말 타는 자세로 앞에 앉고 그 뒤에 남자가 눕는 여성 상위다.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펼치는 중에도 적국의 성문화를 적극 수용했던 로마의 열린(?) 문화관이 이채롭다. 로마인들은 종교도 그랬다. 페르시아의 종교인 미트라 신앙이나 이집트의 이시스 신앙을 받아들였다. 유대인의 기독교도 이방인의 종교이기는 마찬가지다.
벽에 그려진 체위는 단순히 고객의 취향만 고려한 서비스 차원이 아니다. 그림에 나오는 체위별로 가격을 달리 받았다. 업소에서 일하는 여인들은 천차만별이었다. 나이 든 여성, 젊은 여성, 외국인, 내국인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폼페이를 환락의 도시로만 여기면 곤란하다. 휴양도시로서 공부와 사색을 즐기는 인물도 살았다. 이탈리아 출신 저널리스트이자 문필가인 인드로 몬타넬리가 1959년 출간한 ‘벌거벗은 로마사(Storia di Roma, 풀빛, 박광순 옮김)’ 77쪽에는 폼페이에 무려 5000권의 그리스문자와 라틴문자로 된 책을 갖춘 저택이 있었다고 적는다. 향락과 학문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이는 에페소스 업소에서 다시 살펴본다.
◇모로코 로마도시에도 ‘남근 간판’
북아프리카 서쪽 대서양과 접한 모로코로 가보자. 고대 모로코는 마우레타니아로 불리며 로마의 협력국가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마우레타니아 왕 유바 2세에게 시집갔다. 39년 로마 폭군 칼리굴라는 유바 2세를 처형하고 마우레타니아를 로마 속주로 삼는다. 당시 마우레타니아 수도였고 이후 로마도시로 변한 볼루빌리스에는 지금도 개선문과 성벽을 비롯해 로마시대 유적이 남아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구릉 산지에 펼쳐진 로마 거리 한복판에 낯익은 유물 하나가 탐방객을 맞는다. 폼페이에서 보던 남근 내비게이션. 폼페이 것보다 더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디자인이 웃음을 자아낸다. 성매매 업소가 제국 내 곳곳에서 유행했고 영업이나 광고방식이 비슷했음을 보여준다.
◇터키 에페소스의 발바닥 19금 안내판
무대를 터키 최대의 그리스 로마 유적지, 에페소스로 옮겨보자. 2개의 입구 가운데, 항구 유적길 입구로 들어가면 산 중턱에 거대한 그리스식 극장부터 보인다. 여기서 중앙 도로를 따라 아름다운 건축양식의 켈수스 도서관까지 걷다 보면 도로 중앙에 특이한 안내 광고판을 만난다. 발바닥을 그려 놓았다. 무엇일까? 발 방향으로 가면 성매매 업소가 나오는데, 발이 이보다 큰 어른만 입장할 수 있다는 광고 겸 19금 안내판이다.
글·사진 = 김문환 문명사 저술가·세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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