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9.06.26. 00:17
세계에 '스포츠 통한 평화' 보여줘
이런 상황에서 올림픽은 오늘날 세계에서 각기 다른 질서의 상호 연관성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은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한다고 해도 올림픽에서만큼은 서로가 하나가 된다. 문화와 역사의 차이는 올림픽에선 중요하지 않다. 올림픽의 평화로운 경쟁 안에서 한 국가의 성취는 다른 국가에 긍정적인 자극이 되고, 결과적으로 모든 인류 구성원들은 더 탁월한 존재로 꽃피게 된다.
올릭픽 부흥운동을 주창한 프랑스의 올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男爵 )이 1894년 고대 올림픽의 전통을 부활시켰을 때 그가 속했던 정치적 세계는 서로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했다. 유럽의 국경선은 계속 바뀌었다. 일부 국가의 제국주의적 야심이 전 세계에 혼란과 갈등을 야기했다. 하지만 쿠베르탱은 고대 올림픽에 주목했다. 올림픽이 태동했던 시기는 더 격동적이었으나 당시 인류는 올림픽을 통해 화합했다. 쿠베르탱은 고대 올림픽 의식에서 영감을 얻고 친선과 신뢰의 비전을 만들었다.
2019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창립 125주년을 맞았다. 그동안의 역사는 올림픽이 정치·사회적 갈등을 뛰어넘고 대격변의 파고를 헤쳐나가는 계기가 됐다. 올해는 유엔이 올림픽 기간엔 모든 전쟁의 휴전을 선언하는 ‘올림픽 휴전’ 결의를 채택한 지 2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스포츠를 통한 평화’라는 올림픽 고유의 목적을 되새기는데 아주 적합한 시기다.
나는 그동안 46회의 올림픽 대회를 지켜봤다. 많은 경우 대회 현장에 직접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다. 매번 올림픽 대회는 저마다의 특별한 의의를 갖고 있었다. 특히 동독과 서독이 단일팀으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올림픽의 힘을 진심으로 절감했다. 냉전이 절정에 달하고 세계가 핵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도 동독과 서독은 1956년부터 64년까지 8년에 걸쳐 단일팀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올림픽은 한 국가 내부의 갈등을 치유하는 계기도 만들었다. 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여름올림픽이 대표적이다. 당시 개막식이 열렸던 7월의 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고 불렸던 흑백 인종 분리주의의 어둠에서 벗어나 30년 만에 올림픽 무대로 복귀했다.
뿐만 아니다. 한반도에서도 최근 가슴 벅찬 장면이 탄생했다. 2018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 선수단이 공동 입장했다. 올림픽의 역사는 때로는 폭력으로 얼룩졌다. 이스라엘 선수단이 테러에 희생됐던 1972년 뮌헨 여름올림픽의 참사, 축제의 장이었던 1984년 사라예보 겨울올림픽은 대량 학살의 현장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간다. 올림픽 정신의 가치는 손상되지 않는다.
올림픽 대회는 우리에게 진실을 일깨워준다. 경쟁이 반드시 갈등으로 이어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올림픽이 국제정치적으로도 의미를 갖는 까닭이다. 우리 모두가 특징은 다르지만 공동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올림픽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경쟁과 협력이 공존 가능하다는 것은 올림픽의 소중한 교훈이다.
과거와 달리 현재의 세계 질서는 전 세계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시켰다. 각기 다른 국제질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때론 갈등을 빚는다. 올림픽은 이런 상황에서 평화로운 방식의 경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귀중한 상징이다. 내가 볼 때 올림픽은 모두에게 기회다. 올림픽을 통해 인간이 서로가 다름을 극복하고 함께 탁월함을 추구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미래를 위한 기회다. 그 기회를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IOC 명예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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