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8.06. 03:14
최근 의학계, 지속 가능한 '평상심'의 중요한 역할 강조
긍정·도전·지속 세 가지 조화 이루면 암 극복 가능해
K씨는 직원 대여섯 명을 두고 작은 사업을 꾸려가는 자영업자였다. 일감이 뚝뚝 떨어지던 'IMF 파고'는 용케 넘겼지만, 2000년대 후반에 닥친 세계 금융위기는 비켜가지 못했다. 직원들 월급을 못 줄 정도로 사업은 휘청거렸고, 경영 상태는 바닥을 향했다. 50대 중반에 맞은 인생 위기였다. 무력감과 절망감은 그를 매일 술로 이끌었다. K씨는 밀린 직원들 급여를 모두 송금하고, 소주 한 병을 단숨에 마셨다. 그러고는 생을 마감할 작정으로 농약을 들이켰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 발견된 그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위장관을 넣어 남아 있는 농약을 빼내는 위장 세척이 이뤄졌다. 위장은 위산이 분비돼 그나마 농약에 저항성이 있다. 하지만 식도와 인두 점막에는 아무런 보호막이 없기에 제초제 성분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그 결과,목숨은 건졌지만 식도와 인두 곳곳이 짓무르는 상처가 남았다.
목에서 위장으로 내려가는 식사 길을 복원하고 치유하면서, 지낼 만할 때쯤 암(癌)이 발생했다. 자살 시도 후 4년 만이다. 제초제가 파고든 자리에 식도암이 생긴 것이다. 점막 손상이 결국 암으로 비화했다. 삶에서 겪는 모든 행위는 몸 어딘가에 기록을 남기고 흔적을 새기는 법이다.
2014년, 살고자 한 그를 공격하는 암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식도암 3기.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가 병행됐다. 종양내과, 흉부외과, 이비인후과, 치료방사선과, 영상의학과, 핵의학과, 병리과 등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다학제 진료' 연합군을 형성해 암과 맞섰다. 주치의인 강북삼성병원 종양내과 이윤규 교수는 "환자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의료진에 모든 걸 맡겼지만, 그 힘든 항암 치료 과정을 묵묵히 따라오고 적극적으로 임하는 걸 보고 강한 투병 의지가 느껴졌다"고 전했다.
그 덕인지 식도암은 기적적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3년 후 목에 인두암이 발생했다. 이 또한 농약 자살 시도의 후유증이다. 현재까지 그는 항암 치료를 받으며 암과 잘 싸우고 있다. 비록 재발의 위험이 있지만, 10년 전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그는 암 발생 이후 투병 의지를 북돋우며 삶을 꿋꿋하게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뜻하지 않은 질병에 닥쳤을 때 삶에 대한 애착이 살아나 그것이 질병 극복 에너지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그동안 의학계에서는 암이나 큰 병을 앓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는지를 놓고 많은 연구를 해왔다. 일반적으로 "잘될 거야!"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면역 체계를 건강하게 유도해 상처를 빨리 낫게 하고, 암세포 치료를 돕는 것으로 조사된다. 낙천은 심장병이나 뇌졸중 발생 위험도 낮춘다. 하지만 어떤 생물학적 과정을 거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는 명확히 규명이 안 됐다.
한편으로는 누구나 낙천적인 생각을 가질 수 없기에 '낙천의 효과'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괜한 낭패감만 심어 준다는 지적도 있다. 암에 걸려 육체와 정신이 지치고 피곤한데, '명랑'하지 못해서 오는 좌절과 불안이 되레 병세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투병 의지도 마찬가지다. 질병을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는 암 치료에 임하는 바람직한 대처다. 투병 의지가 암 환자의 생존 기간을 늘리고, 재발을 줄인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하지만 지나친 투병 의지는 치료 결과에 일희일비(一喜一悲)를 낳아 지속적인 투병에 방해가 된다는 얘기도 있다.
미국의 의료사회학자는 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등 각지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나 열악한 환경에서도 스트레스를 이기고 건강하게 장수한 이들에게서 공통된 특징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른바 일관된 감각(Sense of Coherence)이다. 그들은 고난과 위기를 도전으로 받아들이되, 긍정적이면서 지속 가능한 평상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대놓고 싸우거나 무조건 인내하는 자세는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긍정과 투지가 암세포를 직접 죽이진 못 한다. 하지만 낙천이 있기에 아침에 이부자리서 일어나 식사를 맛있게 먹게 하고, 밤에 잠자리서 숙면을 취하게 한다. 지속 가능한 일상의 투지가 있기에 일련의 의학적 지시와 고통을 수반한 치료를 따르게 한다. 도전·긍정·지속을 요체로 한 '일관된 감각'은 이제 암 극복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그게 어디 암에만 해당하겠는가. 삶의 위기, 사회적 고난도 그렇게 이겨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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