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황정미칼럼] '혈맹의 추억'

바람아님 2019. 9. 25. 08:38

세계일보 2019.09.24. 23:20

 

북·중은 공동의 적인가 묻는 美 / 文정부 친북·자주노선이 불안 키워

미 육군 일병 윌프레드 허시 주니어, 상병 윌리엄 윈체스터, 미 해병대 일병 그래디 크로퍼드….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다가 최근 1년간 신원이 확인된 72명의 병사 이름이 차례로 호명됐다. 지난 20일 미 하와이 국립태평양기념묘지에서 거행된 ‘전쟁포로·실종자의 날’ 행사장에서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200여명의 ‘잊히지 않을(never forgotten)’ 이름이 불린 뒤 헌화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이날 호명된 72명을 포함해 3만3000여명의 전사자와 7800명이 넘는 실종자는 ‘피로 맺은’ 한·미동맹의 상징이다.
황정미 편집인
미 태평양해병부대 밴드의 장엄한 합주가 흐르는 장내 분위기는 동맹의 무게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바깥 공기는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어제 뉴욕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한·미동맹이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안보의 핵심축으로 추호의 흔들림이 없다고 밝혔다. ‘흔들리는 동맹’에 대한 우려를 의식한 레토릭이다. 데니스 와일더 전 백악관 동아태담당 선임보좌관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탄광 속 카나리아에 비유해 한·미동맹의 붕괴 조짐을 주시해야 한다고 했다. 미 국무부 초청으로 이뤄진 미 인도·태평양사령부, 싱크탱크 관계자들과의 만남에서도 문재인정부와 트럼프정부에서 이완된 동맹의 기류를 감지할 수 있었다.


문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필립 데이비슨 인도·태평양사령관은 17일 간담회에서 “역내 장기적인 전략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미·일 3국이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지소미아 필요성을 강조했다. ‘역내 장기적인 전략적 위협’은 데이비슨 사령관이 인도·태평양사령부 도전과제로 중국을 꼽으면서 쓴 표현이다. 한·미·일 안보공조가 ‘즉각적 위협’인 북한을 넘어 중국을 포괄하고 있음을 뜻한다. 동서문화센터 데니스 로이 수석연구원은 “안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국 측에 지소미아 파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동맹이 잘 작동한 경우는 ‘주적’이 같을 때다. 공동의 적에 맞서야 서로의 국익이 보장된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될 당시 북·중은 한국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함께 총부리를 겨눈 적이었다. 남북관계를 최우선으로 삼는 문정부가 북을 ‘즉각적 위협’으로 보는 미국과 긴밀하게 손발을 맞출 수 있나. 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 미사일방어체계에 참여하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협력을 않겠다는 ‘3불(不)’ 원칙을 천명한 문정부가 중국을 ‘장기적인 전략적 위협’으로 상정한 미국에 협조할 수 있나. 미 당국자들 사이에 이런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미동맹 균열은 불가피하다. 현지에서 만난 어느 안보전문가는 ‘한국 정부가 북·중에 편향된 건 아니다’라고 두둔하는 미측 인사들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가 공개적으로 “남북관계 최대 걸림돌은 유엔군사령부”라고 얘기하는 판에 누가 나서겠나.


문정부의 핵심인 운동권 세력은 한·미동맹을 미국의 지정학 전략에 따른 부산물 정도로 본다. 대중국 포위라는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한국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과연 그럴까. 트럼프 대통령은 틈만 나면 “동맹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한다”고 돈타령을 한다.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줄였다. 트럼프는 자신 또는 자국의 정치·경제적 이해를 위해 동맹 가치를 부정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 현실주의 외교전략가들은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지 않는 동맹은 재구성돼야 한다고 여긴다.


문정부의 친북·자주노선과 트럼프정부의 머니(money)노선은 66년 역사의 한·미동맹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문정부가 서두르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또한 살아 있는 뇌관이다. 북한은 핵보유국 입지를 굳혀가고 중국은 노골적으로 팽창전략을 펴고 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인데 한·미동맹은 흔들린다. 도대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우려하는 이들이 느는 게 당연하다. “조국(曺國)보다 조국(祖國)이 걱정”이라는 지인의 말이 맞다. 조국 없는 나라는 멀쩡해도 동맹이 불안한 조국은 무사할 리 없다.


황정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