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10.12 어수웅·주말뉴스부장)
[아무튼, 주말- 魚友야담]
하루키와 김연수… 에세이는 이들처럼
아쉽게도 수상을 비켜갔지만, 노벨문학상 발표 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을 떠올리곤 합니다.
늘 강력한 후보로 꼽혔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지난주 미국의 유력 문예지 '뉴요커'에는 하루키의 긴 에세이가 실렸죠. 제목은 '고양이 버리기-아버지에 대한 추억'.
네, 맞습니다. 하루키의 열혈 팬들이라면 기억하겠지만, 넉 달 전 일본 문예춘추 6월호에 실린 같은 글의 영역본이죠.
그때 제목은 '고양이 버리기- 아버지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12년 전 이 작가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입니다.
가족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하루키로서는 예외적인 고백입니다.
'나의 뿌리에 대해 처음으로 쓰다'라는 문장이 있을 정도니까요. A4용지로 16쪽에 달하는 적지 않은 분량.
키워드 중 하나는 오랫동안 의절했던 아버지와의 화해입니다. 하루키는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한 지는 꽤 됐지만,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자주 확인하는 요즘입니다.
한 달쯤 전 '아무튼, 주말'에는 소설가 김연수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당시 인터뷰의 핵심 질문 중 하나가 소설가가 쓰는 산문이었죠. 기억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산문 쓰는 노력의 10배를 더 들여야 소설을 쓸 수 있는데, 작가 생각으로 산문은 싸구려고 소설은 명품인데,
왜 독자들은 산문을 더 좋아하는가.
작가가 쓰는 산문의 힘과 매력을 생각합니다. 독자의 삶과 작가의 삶이 즐겁게 때로는 아프게 포개지는 경험들.
사적이지만 하나로 신기하게 합쳐지는 그와 나의 경험.
하루키는 이번 글 마지막에 빗방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광대한 대지로 추락하는 엄청나게 많은 빗방울 가운데 이름 없는 한 방울.
그러나 그 안에는 한 방울만큼의 사상과 역사가 들어 있죠. 비록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뭉텅이로 사라진다 해도,
각각의 방울에는 계승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김연수 역시 말합니다.
한 사람의 삶만 보면 대부분 실패하고 죽는다고. 개인은 그렇게 실패하지만, 길게 보면 다르다고.
대략 200년 안에는 꿈이 이뤄지고, 세상은 조금씩 좋아지는 게 아니겠냐고.
조국 논란으로 불유쾌한 가을, 문학의 힘을 생각합니다.
한트케와 토카르추크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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