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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엔드게임’ 80년대 미·일전쟁처럼 10년 넘게 걸린다

바람아님 2019. 10. 20. 08:24
[중앙선데이] 2019.10.19 00:21

트럼프·시진핑 무역전쟁 ‘스몰딜’ 이후

“빅딜은 이루기 힘든 꿈!”
 

레이건의 미·일 무역전쟁
무역 불균형 환율 체제로 못 바꿔
‘플라자합의’에도 93년까지 이어져
일본 수출주도 전략 포기해 일단락

트럼프의 미·중 무역전쟁
중국 정책 패러다임 전환까지 요구
시진핑 “주권침해” 반발 힘겨루기
미 전문가 “빅딜은 이루기 힘든 꿈”

미국 외교협회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브래드 셋서의 말이다. 올 8월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다. 애초 인터뷰 주제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중국을 전격적으로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한 일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덤으로 무역전쟁 앞날을 물었다. 그는 “이곳(워싱턴) 많은 사람이 미·중 무역전쟁을 패권전쟁으로 본다”며 “이런 무역전쟁이 단숨에 빅딜로 끝날 것 같은가?”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이루기 힘든 꿈”이라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합의안 하나를 내놓았다. 시진핑은 미국산 농산물을 대량으로 사주고 금융시장을 개방하기로 했다. 대신 트럼프는 중국산에 대한 관세를 25%에서 30%로 올리는 조치를 미루기로 했다. 이는 두 나라가 2018년 12월 이후 10개월 정도 밀고 당긴 협상 끝에 첫 결과다. 트럼프는 트위터에 쓴 글에서 “1단계 딜(phase one deal)”이라고 불렀다.
 
서방 언론은 스몰딜(small deal)이라고 했다. 영국 경제분석회사인 캐피털이코노믹스(CE)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닐 시어링은 최근 보고서에서 “그들(서방 언론)이 말한 스몰딜에선 실망감이 엿보인다”고 말했다. 그럴만했다. 직전까지 트럼프 스스로 빅딜의 기대감을 부추겼다. 그는 “새로운 (교역)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플라자합의 착시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트럼프의 말 때문에 올 9월 미국 쪽 전문가들은 ‘무역전쟁 엔드게임(endgame)’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윌리엄 페셋 전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등이 “미·중 합의 패키지에 ‘플라자합의Ⅱ’가 들어있을 수 있다”는 전망을 했다. 플라자합의는 미·일 무역전쟁이 한창이던 1985년 맺어진 ‘달러 약세-엔화 강세 협약’이다. 미·중 사이에도 위안화 강세를 유도하는 합의(플라자Ⅱ)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됐다. 적잖은 미 전문가들이 “플라자Ⅱ가 이뤄지면 미·중 무역전쟁이 막을 내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스티브 행키 미 존스홉킨스대 교수(경제학)는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역사적 사실을 편식하는 바람에 착시현상에 빠진 사람들의 기대”라고 혹평했다. 그는 “1980년대 미·일 무역전쟁은 플라자합의로 끝나지 않았다”며 “9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미·일 사이 무역협상은 93년까지 이어졌다. 그렇지만 시장 참여자들은 플라자합의로 미·일 무역전쟁이 일단락된 줄 알고 있다.
 
플라자합의가 미·일 무역전쟁에서 중요한 분수령이기는 했다. 미국의 주요 교역 상대국인 일본과 독일 등이 자국 통화 강세를 유도하기로 했다. 행키 교수는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이 거품에 빠졌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본의 대미 흑자가 여전히 연 400억~600억 달러에 달했다. 경제 체제 때문에 발생한 무역 불균형을 환율 체제로 바로잡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레이건은 트럼프의 미래
 
로널드 레이건

로널드 레이건

       
프랑스 유명 경영대학원 인시아드 안토니오 파타스 교수(경제학)는 최근 중앙SUNDAY와 통화에서 “트럼프는 자신의 두 번째 임기 안에도 끝내기 힘든 전쟁을 시작했다”며 “레이건 사례를 보라!”고 주문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재임기간: 81~89년)은 당시 경제참모인 행키 교수 등의 반대에도 일본을 상대로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자동차와 섬유, TV, 농산물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전면전이었다. 레이건이 매긴 보호관세 가운데는 세율이 100%에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트럼프의 관세율은 25% 정도다. 레이건이 고율의 관세폭탄을 동원했지만 자신의 임기 안에 끝낸 딜은 일본의 자발적 수출자제(VER)와 플라자합의, 시장개방 약속 정도였다. 자발적 수출자제는 전문가들이 말하는 긴장완화 단계다. 파타스 교수는 “미국이 패권을 위협하는 국가를 상대로 벌인 무역전쟁에서 시장개방 약속만을 받고 물러난 적이 없다”며 “미국은 거시정책 패러다임 전환까지 요구해 관철시켰다”고 말했다. 실제 미·일 무역전쟁의 최종 합의는 일본의 수출주도 성장 전략의 포기였다. <그래픽 참조>
 
21세기 트럼프도 비슷한 양보를 중국에 요구하고 있다. 금융시장 등 시장개방을 압박하고 있다. 지식재산권 등 보호도 시장개방 패키지 가운데 하나다. 게다가 트럼프는 중국의 국유기업 체제변화를 법제화하라고 시진핑에 요구했다. 이는 80년대 레이건의 요구와 닮은꼴이다.
 
레이건은 일본 대기업 집단인 게이레츠(系列)의 지배구조를 바꾸라고 압박했다. 행키 교수는 “레이건 무역정책 참모들이 보기에 금융회사까지 거느린 게이레츠 때문에 일본 기업이 싸고 질 좋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요즘 트럼프의 무역정책 참모들은 중국의 국유기업들이 온갖 보조금 때문에 미국 등 글로벌 시장에 저가의 상품을 쏟아붓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국유기업들이 상습적으로 지식재산권 등을 침해하고 있다고도 진단했다.
 
기업지배구조 개혁 다음은 거시정책 패러다임 전환이다. 미국은 일본을 몰아붙여 수출주도 성장 대신 내수중심 성장전략을 채택하도록 했다. 이른바 ‘신경제를 위한 프레임워크(Framework for a New Economy)’였다.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상대국 경제체질마저 바꾸려는 시도였다.
 
올 4월 스티븐 므느신 미 재무장관은 중국과 협상에 대해 “마지막 구간에 들어서고 있다”고 귀띔했다. 트럼프가 레이건도 단숨에 하지 못한 기업지배구조나 거시정책 패러다임 전환까지 이뤄낼 듯이 보였다. 하지만 막판에 시진핑이 반발했다. 합의 초안 가운데 중국 법을 바꾸는 조항을 “주권침해”라며 수정을 요구했다. 미·중 무역협상은 중단됐다. 트럼프는 관세폭탄을 다시 떨어뜨렸다.  
 
협상결렬은 예견됐던 일이다. 직전 행키 교수 등은 “중국은 일본이 아니다”며 “트럼프가 자신의 정치일정(재선) 때문에 불가능한 일괄 타결(빅딜)을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여곡절 끝에 트럼프는 시진핑과 스몰딜에 합의했다. 무역전쟁의 긴장을 완화하는 단계다. 트럼프가 현실을 받아들인 셈이다. 이제 미·중 무역전쟁은 80년대 미·일 전쟁처럼 10년이 넘는 긴 코스에 들어선 셈이다.
 
“미국산 쌀 소화 못 해”…일, 미 압박에 ‘니혼진론’ 내세워
1980년대 일본은 요즘 중국처럼 드러내놓고 미국 압박을 되받아치지 못했다. 미국 시장이 절실했다. 미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조건 미국 요구를 받아들이진 않았다. 영국 출신 금융역사가인 에드워드 챈슬러는 중앙SUNDAY와 전화 인터뷰에서 “80년대 미·일 무역협상에서 일본 대표들이 아주 흥미로운 이론을 들고 나왔다”며 “바로 니혼진론”이라고 말했다.
 
니혼진론(日本人論)은 ‘일본인과 일본이란 나라는 무엇인가’를 다루는 이론이다. 핵심은 ‘일본과 일본인은 독특하다’는 주장이다. 챈슬러는 “당시 미국 대표가 쌀시장 개방을 강력하게 요구했다”며 “이에 대해 일본 대표는 ‘일본인의 위가 다른 나라와 달라 캘리포니아산 쌀을 쉽게 소화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캘리포니아산 쌀은 일본산 쌀과 같은 자포니카종이다.
 
미국이 스키장비 시장을 개방하라고 요구했을 때도 특유의 니혼진론이 제기됐다. “일본 대표가 ‘홋카이도 눈의 종류가 미국이나 서방과 달라 미국식 스키장비가 일본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놓았다”고 챈슬러는 말했다.
 
‘일본은 다르다’는 주장은 일본식 기업집단인 게이레츠 개혁 요구에 한결 정교하게 제기됐다. 챈슬러에 따르면 일본 대표는 자국 자본주의가 개인이나 개별 기업의 이익 극대화를 중시하는 서방 자본주의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 바람에 ‘일본 기업인들이 게이레츠란 거대한 기업집단을 이뤄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논리를 폈다.
 
챈슬러는 “니혼진론이 이론적으로 얼마나 뛰어난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는 기술로는 나쁘지 않은 듯했다”고 평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