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9.10.27. 07:00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23)
간혹 술자리에서 건배 제의를 받는다. 그러면 항상 내가 외치는 하나의 구호가 있다.
“천천히! 그러나, 불꽃처럼!” 이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도 딱히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나는 다음날, 애초 세웠던 목표대로 밖으로 나가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참 못 말린다. 그러다 보니 이제 남편은, 내가 어떤 것을 하려 했다가 안 하기로 했다는 말을 해도 믿지 않는다. ‘안 한다고? 당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이미 그리 달려가고 있을 것을 나는 잘 알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인생을 보는 관점은, 그 당시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예민하게 좌우된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남은 인생은 너무 짧고 어찌 보면 무척이나 길고 또 길다.
요즘 나는 부천시립 상동도서관 상주 작가로 근무 중이다. 내 책상 옆에, 다양한 연령대의 분들이 공부하러 오고 간다. 며칠 전 아침 출근해 어깨에서 막 가방을 내리는데, 한 중년 남자분이 말을 걸어왔다. 얼마 전부터 온종일 공부 삼매경에 빠지신 분이다.
“저, 이것 좀 봐 주실래요? 이게 뭔지 혹시 아세요?”
그분이 내민 둥근 손아귀에는 수십 개의 볼펜 심들이 고무밴드로 꽁꽁 묶여 있었다. 나는 궁금해서 그게 뭐냐고 물었다.
“이게 뭐냐 하면요. 그간 제가 건축사 시험공부 하면서 사용한 볼펜 심입니다. 사실 이제 또 시작이죠. 아직 한창 일할 나이에 전기업종에서 퇴직하고 뭘 할까 고민 많이 했었습니다. 요즘 자영업자들처럼 치킨집을 차릴까, 피자집이나 편의점을 해볼까 여러 고민을 했지만,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고심 끝에 그간 제가 몸담았던 전기업종에서 조금 연관 있는 건축사 자격증에 도전 중입니다.
그런데 정말 힘드네요. 앞으로 이렇게 다 쓴 볼펜 심 300개를 채워야 그나마 건축이 뭔지 조금 보일 듯합니다. 건축사 공부 시작하고 매일 도서관으로 출퇴근하는데요. 오늘은 그간 말 건네 본 적 없는 작가님께라도 꼭 이 다 쓴 볼펜 심을 보여드리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어머나! 참 대단하시네요. 이걸 필기하면서 다 쓰신 거예요? 우와 요즘 손 글씨 쓰는 사람 보기 드문 편이라 이 한 줌의 볼펜 심이 더 새롭게 보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참 대단하십니다. 많이 축하드립니다. 꼭 좋은 결과 얻으세요.”
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한 가지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1만 시간의 노력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법칙이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매일 세 시간씩 훈련했을 때 약 10년이 걸린다. 하루에 열 시간씩 하면 3년이 지나야 전문가가 된다. 만 시간의 법칙은 1993년에 미국 심리학자인 앤더스 에릭슨이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나왔다. 그는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와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를 비교하며 만 시간의 법칙을 설명했다.
내가 볼 때 만 시간의 법칙은 습관의 중요성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중요한 게 습관이다. 잘못된 습관은 반복될수록 더 위험하다. 그러니 만 시간의 법칙은 바른 방법으로 그것을 꾸준히 반복할 때 효과적으로 얻어지는 자기만의 견고한 기술일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다. 목표가 없다면, 그 고된 노력은 도착할 곳이 없다. 목표지점과 꿈이 없이 만 시간 동안 뭔가를 꾸준히 했을 때 얻어지는 결과물이 있을까? 목표는 곧 그 사람을 앞으로 가게 하는 엔진이다. 여기에 오랜 습관이 더해진다면, 그 끝에는 실로 값진 열매가 기다릴 것이다.
인생 길다.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면 일단 그것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자. 그 공부를 언제까지 완벽하게 마칠 것인지 목표를 정하자. 스스로 약속한 시각 동안, 본인이 정한 목표 지점에 이를 때까지 쉬지 않고 그 이론을 익히자.
가을이다. 부쩍 추워졌다. 찬바람을 피해 도서관은 갈수록 더 많은 인파로 북적일 것이다. 이곳을 찾아오는 많은 이들을 응원한다. 부디 내년 봄쯤에는 모두가, 저마다 목표로 정한 희망과 꿈을 이루고 정상에 서서 두 손 번쩍 들고 환호를 외치길 바라본다.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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