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10.30. 03:17
권력의 난폭에 맞서 공정 담론을 만들어낸 학생과 시민은 정말 황당할 것이다
경쟁 언론에 처음 1면 톱기사로 낙종한 것은 사회부 기자 첫해였다. 그런 기사를 보면 정말 솥뚜껑만 한 손으로 따귀를 맞은 듯 머리가 핑 돈다. 그럴 땐 먼저 기사가 대형 오보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오보가 아닌 것으로 판명 나면 이번엔 자기 방어에 나선다. 취재원이 불순한 목적으로 경쟁지에 찔러준 것이라고 우긴다. 그마저 변명의 여지가 없으면 취재원이 경쟁지 간부와 친해 흘려줬다는 '면피' 발언까지 일삼는다. 기자에게 낙종은 어제의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정신 승리'라도 해보겠다고 그렇게 발버둥친다.
그래 봤자 다른 특종으로 만회할 때까지 '물먹은 놈'이다. 언론계에서 '물먹었다'는 말은 낙종했다는 뜻이다. 1면 톱으로 물먹은 그날 저녁 식사 때, 나는 선배로부터 "물 ×먹고 밥이 넘어가?"란 말을 들었다. "너 물먹인 ×× 사무실 문을 차고 들어가 기사 줄 때까지 죽치고 있으라"는 말도 기억난다. 그날 이후 열흘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고 기사를 찾아 돌아다녔다. 언론계에서 '물 먹은 놈'보다 더 치욕적인 말은 '물×먹고 만회도 못 하는 놈'이다. 결과는 화려하지 않았다. '만회하려고 노력은 하는 놈' 수준에서 그럭저럭 버텼다.
'조국 취재' 국면에서 한국 언론은 물을 먹고 먹이는 일전을 치르고 있다. 고위 공직자 검증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조국씨의 권력 때문에 언론사는 몇 배 더 화력을 집중했다. 서초동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처럼 "편파적"이라고 주장하면 안 된다. 언론의 본성은 센 권력을 더 세게 파고드는 것이다. 한국 언론은 이번 국면에서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계 일전을 중간 정리하면 이렇다. 낯 뜨겁지만 솥뚜껑만 한 손으로 따귀를 맞은 이야기부터 할 수밖에 없다. 먼저 '두 번 유급한 조국씨 딸이 6학기 연속으로 장학금을 받았다'는 기사다. 다음은 '조국씨 딸이 고교 재학 중 학회 논문 1저자로 등재됐다'는 기사다. 경쟁지들엔 특종이었지만 나에겐 아주 쓰린 낙종이었다. 이번에도 방어 욕구가 발동했다. 오보? 아니다. 우리도 그 근처까지 취재했다. 검찰이 찔러준 것? 아니다. 검찰 수사가 시작도 안 될 때였다. 아무리 달리 해석하려고 안달해도 기자들이 학회, 대학을 발로 뛰어 만들어낸 정통 발굴 기사였다.
본지 기자들도 의미 있는 기사를 만들어냈다. 대부분 현장 기자들이 발로 찾아낸 것들이다. 조국 아내 정경심씨가 몰래 학교 컴퓨터를 빼내가는 화면 한 컷을 얻기 위해 기자들이 사흘 밤낮으로 학교를 지켰다. 조국씨 딸의 1저자 논문이 대학 입학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는 법무부 주장은 기자들이 인터넷 숲 속에서 찾아낸 10년 전 입시요강에 의해 거짓말로 드러났다. 유급한 조국씨 딸에게 장학금을 지급한 교수가 대통령 주치의 선정 때 일익을 담당했다는 문서도 기자가 대학 현장에서 발견한 것이다. 한국 언론이 만들어낸 이런 크고 작은 팩트가 모여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다. 학생들은 '공정(公正)'이란 깃발을 들고 나왔다. 수많은 시민이 합세해 '공정'을 시대의 거대 담론으로 끌어올렸다. 언론이, 학생이, 시민이 발품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기자들이 절대선을 목표로 권력과 투쟁한다고 주장하지 않겠다. 물먹고 먹이는 경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표현이 현실적이다. 이런 경쟁 과정에서 검찰에서 흘러나온 정보가 보도될 수 있다. 과장도, 오보도 있을 수 있다. 책임은 언론이 진다. 하지만 '공정' 담론의 불씨가 된 결정적 기사는 검찰이 찔러준 정보가 아니라 거의 기자들이 발로 뛰어 찾아낸 팩트들이다. 나는 이번 사태에서 검찰의 개입이 성급했다고 생각한다. 권력이 개입하면 역풍을 부른다. 언론, 시민, 상식이 '조국'이라는 위선 덩어리를 언젠가 몰아낼 수 있었다고 믿는다. 수사가 늦어져 조국 가족을 구속하지 못했다고 해도 언론과 시민의 상식으로 자연정화하는 것이 이 사회에 좀 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조국씨가 장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날, 문재인 대통령은 "공정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한국 언론을 향해 '깊은 성찰'을 요구했다. 권력과 관변 세력들은 '피의사실 공표죄'를 들먹이며 언론이 검찰의 정보 공작에 가담해 큰 잘못을 한 것처럼 호응한다. 이럴 때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말을 쓰면 누구처럼 "대통령이 도둑이냐"라며 화를 낼 것이다. 그러니 '눈 뜨고 코 베인 기분' 정도로 해두자. 대통령의 난폭한 아집에 맞서 '공정'을 시대 담론으로 끌어올린 수많은 학생과 시민은 더 황당할 것이다.
'人氣칼럼니스트 > 선우정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우정 칼럼] "경찰 파쇼보다 검찰 파쇼가 낫지 않을까" (0) | 2019.12.11 |
---|---|
[선우정 칼럼] 文 정권은 독도를 지킬 수 있을까 (0) | 2019.11.21 |
[선우정 칼럼] 文 정권의 '검찰 개혁'은 가짜다 (0) | 2019.10.09 |
[선우정 칼럼] 검찰 개혁을 바란다면 이재수 묘를 참배해야 했다 (0) | 2019.09.19 |
[선우정 칼럼] 反日을 해도 文 정권처럼 하면 미래가 없다 (0) | 2019.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