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가슴으로 읽는 한시 - 지팡이 짚고서

바람아님 2014. 1. 11. 10:29

(출처-조선일보 2014.01.11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가슴으로 읽는 한시 일러스트     지팡이 짚고서


    지팡이 짚고서 사립문 나서니
    상쾌한 기분이 끝없이 샘솟네.


    사방의 산들은 창을 세워 호위하고
    한 줄기 시내는 구슬처럼 흘러가네.


    솔숲 길에 학이 서서 날은 저물고
    바위틈에 구름 피어 서늘해지네.


    까마득히 떠오르네 십 년 세월 꿈이여!
    그 속에서 내 얼마나 허둥댔던가!


  송윤혜


    倚杖(의장)


    倚杖柴門外(의장시문외)    悠然發興長(유연발흥장)
    四山疑列戟(사산의열극)    一水聽鳴璫(일수청명당)
    鶴立松丫暝(학립송아명)    雲生石竇凉(운생석두량)
    遙憐十年夢(요련십년몽)    款款此中忙(관관차중망)


                                         -이숭인(1349~1392)


고려말의 시인이자 학자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9~1392)의 시다. 

날이 저물어 가는 저녁은 지팡이를 찾아 짚고 산책하러 나가기 좋은 시간이다. 

걸음걸음마다 나를 맞이하는 것은 바쁜 하루의 피로를 잊게 하는 풍경이다. 

사방의 산과 졸졸 흐르는 시내가 나를 반긴다. 

학은 솔숲의 갈림길에 선 채로 어둠에 묻혀 가고, 저녁 구름은 바위틈에서 피어올라 몸을 오싹하게 한다.

저 정겨운 풍경을 보고 있으면 남들은 여유롭다고 하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십 년 세월 동안 뭔가를 이뤄보겠노라고 허둥댔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십 년 세월의 꿈이 있었다. 

지팡이에 몸을 싣고서 바라보니 세상사 참으로 허망하다. 


도은은 그 허망한 꿈을 이루고자 다시 세상을 나갔고, 정도전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