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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김찬희] 1849년 중국, 2019년 한국

바람아님 2019. 12. 13. 10:03
국민일보 2019.12.12. 04:02

노르웨이 최북단에 있는 스발바르제도는 사람보다 북극곰이 더 많고, 나무가 없는 곳이다. 북극점에서 고작 1300㎞ 떨어져 있다. 스발바르제도의 가장 큰 섬 스피츠베르겐에는 거대한 저장고가 하나 있다. 2006년 짓기 시작해 2008년 본격 가동한 이 저장고는 ‘글로벌 시드 볼트’(세계 씨앗 저장고) 또는 ‘인류 최후의 금고’로 불린다. 이곳에 전 세계에서 모은 식량 종자 96만8000점(2018년 기준)이 잠들어 있다.


경북 봉화군 백두대간 국립수목원에도 비슷한 씨앗 저장고가 있다. 2016년 문을 연 백두대간 시드 볼트는 스발바르 시드 볼트와 함께 전 세계에서 두 개뿐인 ‘종자 영구 저장고’다. 백두대간 시드 볼트에는 야생식물 종자 5만880점이 모여 있다. 시드 볼트는 기후변화,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식량 종자나 야생식물이 멸종하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씨앗을 보존하는 게 목적이다.


씨앗은 인류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식량은 물론 옷, 의약품, 화장품 등에 걸쳐 깊게 뿌리를 박고 있다. 때로는 전쟁의 방아쇠가 되기도 한다.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의 도화선은 양귀비 열매에서 추출한 아편이다. 영국은 청의 차(茶)를 대량 수입하면서 빚어진 막대한 무역적자를 해소하려고 인도산 아편을 밀수출했다. 차나무는 동백나무과 상록관엽수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아예 차 수입구조를 뜯어고치려는 야욕을 품는다. 중국 내륙의 유명 차 산지에서 묘목과 씨앗을 훔쳐 기후 조건이 비슷한 인도 북부에서 직접 재배·생산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산업 스파이’로 스코틀랜드 출신 식물학자 로버트 포천이 선택됐다. 3년간 변발하고 중국 옷을 입은 채 숨어다닌 포천은 1849년 7월 우이산(武夷山)에서 고급 품종 ‘대홍포’의 묘목과 씨앗을 얻어내기도 한다. 1851년 2월 차 생산인력과 1만2838개의 씨앗을 실은 배는 홍콩을 떠나 인도로 향했다. 그 뒤로 인도 북부 히말라야산맥의 모든 차밭은 포천이 보낸 차나무의 자손을 보유하게 됐다. 인도는 중국을 앞지르는 차산업을 키워냈다. 19세기 말 중국의 세계 차 시장점유율은 10% 수준으로 급락했다.


21세기 종자전쟁은 더 역동적이고 치열하다. 지난해 독일의 바이엘은 미국 종자 기업 몬산토를 630억 달러에 인수했다. 바이엘은 세계 5위, 몬산토는 1위다. 중국의 켐 차이나는 스위스 신젠타를 430억 달러에 사들였다. 신젠타는 세계 3위다. 기업 인수·합병(M&A)이 치열한 종자 관련 산업의 규모는 780억 달러(종자시장 372억~450억 달러)로 추정된다. 여기에다 연평균 5%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독일 바이엘, 미국 다우듀폰, 중국 켐 차이나는 시장을 지배하는 ‘공룡 3인방’이다. 미국·중국·일본·프랑스·독일·덴마크·네덜란드 기업이 상위 10위권을 형성하며 시장을 주름잡는 동안 한국 기업은 명함도 못 내밀고 있다.


한국은 매출액 5억원 미만 종자 업체가 전체의 87.9%를 차지한다. 무역적자는 차치하고 종자 로열티로만 빠져나간 돈이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1400억원이다. 개별 품목의 종자 자급률은 처참하다. 팽이버섯은 약 80%가 일본 품종이다. 양파는 자급률 28.2%에 그치는데 일본산이 70~80%를 장악하고 있다. 포도(4.0%) 감귤(2.3%) 배(13.6%) 사과(19.0%)도 상당수가 일본산 종자에 의존한다.


뒤늦게 정부는 2012년부터 2021년까지 4911억원을 투입하는 골든 시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그래도 여전히 한국 종자산업은 인력, 기술력, 자금력에서 ‘영세기업’이다. 무역적자와 로열티를 감수하면서 외국산 종자를 쓰고 있는 2019년 한국은 1849년 차 씨앗을 강탈당한 중국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귀한 줄 알지만 지키지 못했거나, 현재에만 머물러 있거나. 이공계 대학에 진학하면 너도나도 의사, 약사가 되기를 원하는 시절에 농산업이나 종자에 꿈을 거는 연구자가 나오길 기대하는 건 백년하청(百年河淸)일까.


김찬희 경제부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