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5] 이슬람 사원에 성모 마리아.. 두 文明이 공존하는 '세계의 보석'

바람아님 2019. 12. 13. 10:08

조선일보 2019.12.11. 03:13

 

[스페인 코르도바] 711년 북아프리카서 이슬람 건너와 찬란한 문화
1236년 再정복한 페르난도 3세, 이슬람 양식 그대로
- 베르베르族 타리크가 인솔, 해협 건너
10년만에 스페인 대부분 정복, 지브롤터 이름도 타리크서 유래.. 아브드 알 라만 3세때 인구 20만
- 도서관 80곳, 장서 40만권 '문명 중심'
과학·철학·문학·의학 세계 최고.. 피레네 산맥 넘어 중세 유럽 깨워
2만5000명 수용 메스키타 사원, 화려한 모자이크·玉으로 장식
- 16세기에 성모 마리아 제단 설치
코르도바 점령한 기독교 세력, 사원을 전리품으로 여겨 파괴 안해

스페인 남부의 코르도바 모스크-성당(Mezquita-Catedral de Córdoba)은 마치 천 년 전 시간 속에 멈추어 선 듯하다. 이 웅장한 건물은 메스키타(Mezquita·대모스크)라 부르는 이슬람 사원이자 가톨릭의 성모승천성당(Catedral de Nuestra Señora de la Asunción)이기도 하다. 800년 동안 이슬람 지배 아래 있다가 소위 '재정복 운동(Reconquista)'으로 기독교권에 되돌아간 스페인 역사가 이처럼 흥미로운 건축물을 낳았다.


스페인 땅에 이슬람 세력이 들어온 것은 711년 일이다. 아랍에서 떠난 무슬림들이 북아프리카까지 팽창해서 현지 주민들(베르베르인)을 이슬람교로 개종시켰는데, 베르베르족 군 지휘관 중 한 명인 타리크(Ṭāriq ibn Ziyād)가 대군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가 스페인 남부 지방을 정복했다. 지브롤터(Gibraltar)라는 이름도 '타리크의 산'이라는 뜻의 '자발 타리크(Jabal Ṭāriq)'에서 유래했다. 그 당시 기록이 제대로 없어 이슬람 세력이 유럽 땅으로 들어온 연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설에 따르면 스페인 현지 세력 간 갈등 끝에 세우타(Ceuta) 백작이 외세를 불러들인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불러들인 이슬람 세력이 콜럼버스의 해인 1492년이 되어서야 아프리카로 돌아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이후 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스페인 땅 대부분이 쉽게 정복되었다. 이렇게 이슬람 치하에 들어간 스페인 땅을 알 안달루스(Al Andalus)라 칭했으며, 코르도바는 그 수도가 되었다.


스페인 땅에 들어온 이슬람 세력

당시 알 안달루스는 아라비아반도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권 전체 지형에서 보면 가장 먼 변방에 속했다. 군사·종교적 지배만 이루었을 뿐, 경제적·문화적으로 뒤처져 있었다. 그랬던 이곳이 점차 문명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 데에는 칼리프(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잇는 이슬람 제국의 주권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이슬람권 내부의 충돌이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라크의 아바스 왕조가 시리아의 우마이야 왕조를 몰락시킨 후, 이전 왕실 가문 사람들을 악착같이 찾아내 살해하려 했다. 난을 피해 겨우 목숨을 구한 아브드 알 라만(Abd al-Rahman)이 먼 스페인 땅까지 피신해 왔다. 그는 곧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알 안달루스의 지배 군주로 올라섰다(아브드 알 라만 1세, 재위 756~788).


무슬림 지배자들은 현명한 통치 전략을 구사했다.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을 제거하거나 강제 개종시키는 게 아니라 높은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자기 종교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비록 이등 시민으로서 차별 대우를 받긴 하지만, 아예 쫓겨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공생하며 융합하는 무대가 만들어졌다.

이슬람치하에서 알 안달루스는 번영을 구가했다. 벼, 사탕수수, 시금치를 비롯한 각종 신작물이 들어왔고, 누에를 길러 비단 직물을 짜서 멀리 인도까지 수출했다. 수도 코르도바는 경제와 문화 중심지로서 일취월장 발전해 갔다. 시내에는 수백 곳의 목욕탕과 아름다운 정원들이 존재했고, 시장에서는 직물, 보석, 무기, 상아 공예품 등 사치재 소비품이 거래되었다. 탑 132기와 성문 13개를 갖춘 웅대한 성벽이 시 중심부를 두르고 있지만, 인구가 20만에 이를 정도로 커지자 성벽 너머로 도시가 커져 갔다.

'세계의 보석'이라 일컫는 코르도바

아브드 알 라만 3세(912~961)가 스스로 칼리프를 주장할 무렵, 코르도바는 바그다드와 경쟁할 만한 문명 중심지로 떠올랐다. 당시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사람들 대부분이 글자를 깨치지 못한 참담한 상태였을 때, 코르도바에는 도서관이 80곳이었고, 거리에는 서적상이 줄지어 있었다. 다음 지배자인 알 하캄(al-Hakam) 2세는 장서를 40만 권 보유한 대도서관을 지었다. 주변 국가 학자들이 과학, 의학, 철학을 배우려고 코르도바로 모여들었다. 10세기 독일 여류 시인 흐로츠비타(Hrotsvitha of Gandersheim)가 이곳을 '세계의 보석'이라 일컬은 것은 과장이 아니다. 발전한 농경 기술,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과 철학, 그리고 세련된 문학과 예술 등 알 안달루스의 선진 문명 요소들이 피레네 산맥 너머로 전해져서 중세 유럽 문명이 발전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혼란기가 시작되어 1031년에 코르도바 칼리프 체제는 종말을 맞았고, 13세기에는 코르도바가 기독교도 수중으로 넘어갔다.


코르도바 메스키타는 이런 역사 흐름을 반영한다. 처음 알 안달루스 지배자로 올라선 아브드 알 라만 1세는 바그다드에 뒤지지 않는 대규모 사원을 짓고자 했다. 시내 중심부에 있던 성 비센테 성당을 허물고 그곳에 메스키타를 건축하는 대신, 기독교도에게는 다른 곳에 새 성당을 짓도록 했다. 그의 시대에 사원이 완성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장돼 종내 신자 2만5000명을 수용하는 규모로 커졌다. 남북 180m, 동서 130m에 이르는 이 건물은 로마의 베드로 성당보다 약간 작은 수준이다. 사원 내부는 이국적 화려함을 자랑한다. 석영, 벽옥, 대리석, 화강암 등으로 만든 가늘고 둥근 기둥은 흰 석재와 붉은 벽돌을 교대로 조합한 이중의 말굽형 아치를 받치고 서 있다. 850개에 이르는 기둥 숲 안에 남북 방향 19개, 동서 방향 29개의 소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벽면에서는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화려한 장식이 빛나고, 천장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가져온 정교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1236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가 코르도바를 정복하여 이 지역은 기독교권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 흔히 하던 대로 이슬람 사원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한 것은 천만다행이다. 아마도 보석처럼 아름다운 이 건축물을 적에게서 빼앗은 트로피로 여겼던 듯하다. 메스키타는 가톨릭 성당으로 변모했다. 결과적으로 부분적 변형을 피할 수는 없었다. 16세기에 중앙 일부분을 부수어 마리아에게 바치는 제단과 십자형 성가대석을 설치하고, 사방 벽을 따라 소성당을 세웠으며, 이슬람식 뾰족탑(minaret) 대신 종탑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식 건물 안에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매우 특별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변화한 부분은 전체 건물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황제 카를로스 5세는 이를 애석해하며 질책하는 서한을 보내왔다. "당신들은 누구든 지을 수 있는 것을 만드느라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건물을 부수었소." 사실은 황제 자신도 알람브라 궁전에 비슷한 변형을 가했지만 말이다.


[코르도바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븐 자이둔과 왈라다

이븐 자이둔(Ibn Zaydun)과 왈라다(Wallada Bint-al Mustakfi)는 서구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해당한다. 여류 시인 왈라다는 그동안 이름이 거의 잊혔다가 최근 문학사에서 복원되었다. 그녀는 알 안달루스 문화가 정점을 향해 발전해 가던 때인 994년 코르도바에서 칼리프 무함마드 3세와 기독교도 노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025년 정치적 격변기에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왈라다는 물려받은 가산으로 문학 살롱을 열고 독립적 삶을 살았다. 이곳은 이내 코르도바 지성인들의 집합소로 발전했다. 이 시기 코르도바는 마치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가 그러했듯 정치적으로 쇠락하면서 문화는 오히려 활짝 꽃피었다. 문인들은 거침없이 열정을 분출하는 혁신적 시를 썼다.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이 시대 문학이 근대 서구 낭만주의 시의 원천이었으리라 주장한다.


그 물결의 선두에 왈라다가 서 있다. 그녀는 이븐 자이둔이라는 야심에 찬 정치인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는 하필 자기 아버지 암살에 깊이 관련된 집안 남자였다. 두 사람은 밤에 몰래 만나고, 떨어져 있을 때에는 긴 편지를 주고받다가 사랑의 배신에 애통해한다. 이들이 주고받은 글 속에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내밀한 시어(詩語)들이 반짝인다. 루이스(C.S. Lewis·'나니아 연대기' 작가로 알려진 영국 영문학자)는 이븐 자이둔과 왈라다가 만들어내고 후대에 넘겨준 '궁정풍 사랑(courtly love)'의 시가는 유럽 문학 사상 가장 중요한 변화이며 "이 혁명에 비하면 르네상스는 단지 잔물결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