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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중 교수의 음식예찬① 러 표트르대제가 바꾼 음식문화

바람아님 2019. 12. 16. 21:12

(조선일보 2019-12-15 글 석영중 고려대 중앙도서관장, 편집 김혜인 기자)
 

석영중 교수의 음식예찬①

러 표트르대제가 바꾼 음식문화
서양 ‘코스요리’의 기원이 러시아인 줄 아셨나요?


표트르 대제
 
 1696년 24세 나이로 광활한 러시아 땅의 황제로 등극한 표트르 대제(1672~1725)는

러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서구의 눈에 야만적이고 미개하고 낙후된 거인으로

비쳐졌던 러시아를 세련된 유럽 신사로 바꿔 놓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네덜란드산 치즈, 프러시아 치즈, 함부르크 베이컨


정부와 군대, 산업, 교육과 문화, 종교 심지어 음식문화까지 완전히 서구식으로,

그것도 단시간내 바꿔버렸다. 21세기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도

그때 음산한 늪지대에서 유럽식 궁궐과 조각물로 가득찬 화려한 수도로 바뀌었다.  


표트르의 서구화 정책으로 ‘유럽을 향한 창문’인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음식 문화도 획기적으로 서구화되었다.


지금 러시아 식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자만 해도 1716년 표트르 대제가 로테르담에서 가져온 것이며, 프랑스에서

와인과 브랜디, 헝가리에서 스위트 와인, 네덜란드에서 치즈, 프러시아에서 버터, 함부르크에서 베이컨이 수입되었다.


신선한 사과와 배와 레몬과 수박이 육로와 해로로 페테르부르크에 배달되었고 얼음과 셔벗과 기타 온갖 진미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모셔온 요리사들에 의해 조리되었다.


그때까지 러시아인들이 즐겨 먹던 ‘나의 음식’은 질보다 양이었다.

모스크바 시대, 즉 17세기까지 러시아 음식은 허기를 충족시켜준다는 데 일차적 의미를 두었다.

당시 러시아가 엄격한 러시아 정교의 지배를 받는 종교국가였으므로 ‘미식(美食)’의 개념은 낯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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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성들의 일상은 정교회 달력에 의해 통제를 받아 1년중 무려 200일 가까이는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모든 육류와 버터, 치즈 등 유제품, 달걀을 먹을 수 없었다.



또한 크고 웅장하고 압도적인 것을 좋아하는 모스크바 시대의 정치적 관념은 음식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이반 뇌제(이반4세:1530~1584)가 1557년 베푼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된 영국인 리처드 챈슬러는 이렇게 기술했다.


수백마리의 통백조구이, 수백마리의 통공작구이, 학과 거위와 뇌조 고기, 구운 쇠고기, 돼지고기와 토끼고기,

철갑상어가 줄을 이어 나왔고, 과일은 층층이 쌓여 올려져 꼭 피라미드처럼 보였다. 만찬은 여덟시간 동안 진행됐다


황제의 만찬뿐 아니라 일반 귀족의 만찬 역시 믿을 수 없이 엄청난 양의 음식을 특징으로 삼았다.

모든 것에서 극단적이었던 러시아인들은 음식도 양적인 극단으로 몰고 갔다. 세련된 요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떤 문화학자는 당시 러시아인들의 평균 수명이 유럽에 비해 훨씬 낮았던 것은 지나친 대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견을 펴기도 했다. 러시아 식문화는 허기를 해결해주는 것과 아울러, ‘양’으로써 권력을 말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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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겁지겁 음식이나 술에 달려들지 말고… 나이프로 이 쑤시지 말며


이에 반해 표트르 대제의 ‘음식’ 개혁은 ‘남의 음식’을 통해 ‘미각(味覺)’이란 새로운 개념을 소개시켜줘 러시아인들은

비로소 식도락과 미식의 그 화려한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표트르의 개혁은 단지 음식 맛 자체 뿐 아니라 음식을 먹는 방식, 음식이 차려지는 방식, 음식이 담겨지는 그릇의 미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변화를 유도했다. 청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유럽식으로 개편하기 위해 1717년 출간된 가이드북

<젊은이들의 참된 거울>을 보면 춤추는 법은 물론 코 푸는 법, 식탁예절까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허겁지겁 음식에 달려들지 말고, 돼지처럼 게걸스럽게 먹지 말고, 수프를 훅훅거리며 불지 말고, 쩝쩝거리며 먹지

말아야 한다. 술에 달려들지 말고, 음주는 절제하며 만취는 피하고 필요한 만큼만 먹고 마셔야 한다.


체면상 여러차례 거절한 뒤에야 음식을 먹되 약간만 덜어먹고 남은 요리는 다른 사람에게 감사의 말과 함께 넘겨야 한다.

접시에 두 손이 오랫동안 놓여 있어서도 안 되고 다리를 탁자 밑에서 흔들어서도 안 된다.

술이나 물을 마신 뒤 손으로 입을 닦아서는 안된다. 반드시 수건을 사용해야 한다. 음식을 다 삼킨 뒤에 반드시

음료를 마시고 손가락을 쪽쪽 빨지 말아야 한다. 뼈에 붙은 고기는 나이프로 잘라서 먹어야지,

뼈째 들고 갉아 먹어서는 안된다. 나이프로 이를 쑤시지 말고 반드시 이쑤시개를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서구식 식문화를 도입해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변화를 겪은 러시아 음식문화는 19세기에 이르면

오히려 역방향의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남의 음식’에 매료되었던 러시아인들은 ‘나의 음식’의 장점을 재발견했으며 ‘남의 음식’과 ‘나의 음식’간의

충돌과 융합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찾아냈다.


19세기 러시아에 초빙된 프랑스 쉐프들은 프랑스식의 러시아 요리를 창조해 역으로 프랑스에 전파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수프 바그라티웅(Soup Bagration, 아스파라거스와 송아지고기가 들어간 크림수프)’,

‘수바로프 꿩고기(Pheasant Souvaroff, 꿩고기와 송로버섯과 거위간을 넣어 구운 바삭바삭한 파이)’

‘샬로테 뤼스(Charlotte russe, 푸딩)’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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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럽 식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러시아식 서빙 방법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 음식의 ‘코스 요리’ 기원이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만찬 시에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식탁 위에 차리는 것이 관례였다. 모든 음식이 한꺼번에 식탁에

오르니 장관이긴 한데 찬 음식, 샐러드, 디저트 같은 음식과 막 조리된 뜨거운 음식들이 같이 있는 것은 문제였다.


반면에 러시아에서는 찬 음식과 더운 음식이 차례차례 날라져 실용적이면서도 심리적, 미각적으로 식도락 기쁨을

배가시켜주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러시아식’ 식사법에 열광했고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대부분의 프랑스 귀족들은

러시아식 코스 요리로 식문화의 방향을 전환했다. <계속>


※ 이 글은 석영중 교수의 저서 <푸슈킨에서 솔제니친까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예담, 2013)>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며 고려대 중앙도서관장을 겸하고 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연의 연구, 교수 활동은 물론

강연, 집필, 방송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2000년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슈킨 메달을 받았고 제 40회 백상출판번역상을 수상했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한국슬라브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뇌를 훔친 소설가>, <러시아 시의 리듬>, <러시아 현대 시학>, <러시아 정교>,

<석교수의 청소년을 위한 번역 교실>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뿌쉬낀 문학작품집>,

<분신>, <가난한 사람들> 등 다수가 있다.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 푸슈킨에서 솔제니친까지
저자: 석영중/ 예담/ 2013/ 375 p.
892.809-ㅅ328러/ [정독]어문학족보실/ [강서]3층 어문학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