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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의 조선의 비주류 인생 [ 제727호] 박뱁새, 그의 입은 오케스트라

바람아님 2014. 1. 21. 12:09

(출처-한겨레21 2008.09.19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입으로 각종 소리를 흉내내는 ‘구기’의 달인들… 신묘한 소리로 대중을 웃기고 울리던 조선의 연예인

현대의 대중문화는 모든 사람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대중문화를 접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이런 현상은 도시 문명의 발달과 상업자본·매스컴의 발달과도 관계가 있다. 대중문화가 발달하면서 전통시대에 대중을 사로잡았던 많은 기예는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대중의 시선을 획득하지 못해 천천히 사라져서 그런 문화가 옛날에 존재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수백 년 전에도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인기를 누리던 다양한 장르의 대중문화가 있었다. 그런 기예 가운데 ‘구기’(口技)라는 것이 있고, 그 기예의 명인도 이름을 남겼다.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절묘한 경지, 손님들이 도망가려 하다

구기란 입으로 하는 기예로서,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목소리와 새나 짐승 울음을 비롯한 각종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규경은 이를 ‘성희’(聲戱)라고 불렀다. 현재에도 ‘성대모사’라는 이름으로 연예인들이 이런 재주를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구기는 성대모사의 초보적 재주가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공연하는 전문적인 기예다. 

조선조 전 기간을 통해 이러한 구기(口技)가 연행됐으나,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널리 공연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다. 조선 초기의 야사인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함북간(咸北間)과 대모지(大毛知), 불만(佛萬)이란 예능인의 구기 재주가 소개됐다. 그 가운데 함북간의 재능은 이렇다.

“우리 이웃에 함경도에서 온 함북간이란 자가 있었다. 피리도 제법 불고 이야기와 광대놀이를 잘했다. 남들의 생김새와 행동을 보기만 하면 바로 흉내를 냈는데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또 주둥이를 오므려 각종 피리 소리를 냈는데 소리가 몹시 웅장하여 몇 리까지 퍼졌다. 비파와 거문고 소리도 입에서 나오면 가락이 잘 어울렸다. 궁궐에 들어가기만 하면 상을 많이 받았다.”

함북간은 단순한 성대모사에 그치지 않고 음악까지 입으로 연주한 수준이었다. 궁궐까지 들어가 상을 받았으므로 임금 앞에서 공연한 인기인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구기는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널리 성행해 근대까지 각종 무대에서 꾸준히 연행됐다. 

중국의 구기(口技)에 대해 서울대 이창숙 교수가 ‘만뢰(萬籟 )를 울려 내는 입의 재주-구기(口技)’(<문헌과해석> 21호)에서 

상세히 설명했다. 이 교수는 구기를 요령 있게 설명한 <청패유초>(淸稗類鈔)의 글을 소개했다.


“구기는 백희(百戱)의 일종으로 구희(口戱)라고도 한다. 동시에 각종 음향과 여러 사람의 목소리, 조수의 울음소리를 내어 청중을 즐겁게 한다. 세상에서는 격벽희(隔璧戱) 또는 초성(肖聲), 상성(相聲), 상성(象聲), 상성(像聲)이라고도 부른다. 팔선탁을 가로로 놓고 장막을 둘러친 다음 그 속에 한 사람이 숨어서 오직 부채 한 자루, 나무토막 하나만 사용한다. 듣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한 사람이 하는 줄 모른다.”

이 글을 보면, 구기는 일정한 형식을 갖춰 공연됐다. 많지는 않지만 절묘한 경지에 도달한 예능인의 공연 실례가 몇 가지 전한다. 그 하나가 명말청초 사람 장조(張潮)가 편찬한 <우초신지>(虞初新志) 1권에 실려 있다. 이 책은 조선에서도 널리 읽혔다. 그 글은 바로 임사환(林嗣環)이 쓴 ‘추성시자서’(秋聲詩自序)다.

“서울에 구기를 잘하는 자가 있습니다. 손님을 모아 잔치를 열어 대청의 동북쪽 구석에 팔 척 병풍을 펴고 구기 하는 사람이 병풍 안에 앉았는데, 탁자 하나, 의자 하나, 부채 하나, 무척 하나뿐이었습니다. 많은 손님들이 둘러앉고, 잠시 후 병풍 안에서 무척을 두 번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조용하여 떠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멀리 깊숙한 골목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자 아낙이 놀라 깨어 하품을 하고는 사내를 흔들어 방사(房事)를 요구합니다. 사내는 잠결에 중얼거리며 처음에는 시큰둥합니다. 아낙이 계속 흔들어 깨우자 둘의 말이 점차 뒤섞이더니 침상이 삐꺽거립니다. 이윽고 아이가 깨어 크게 울자 사내가 아낙에게 아이를 달래라고 합니다. 젖을 물리자 아이는 젖을 물고 울고 아낙은 아이를 다독이며 자장자장 달랩니다. (중략) 별안간 한 사람이 ‘불이야!’라고 크게 외치자 사내가 일어나 크게 외치고, 아낙도 일어나 크게 외치고, 두 아이가 일제히 웁니다. 갑자기 수백 수천 명이 크게 외치며, 수백 수천 아이가 울며, 수백 수천 마리 개가 짖습니다. 그사이에 집을 끌어당겨 무너뜨리는 소리, 불이 터지는 소리, 휭휭 바람 소리가 수백 수천 함께 일어납니다. 또 수백 수천의 살려달라는 소리, 집이 흔들리는 소리, 물건 빼앗는 소리, 물 뿌리는 소리가 섞여 나옵니다. (중략) 그러자 손님들은 낯빛이 변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떨쳐 팔뚝을 내고 두 다리를 떨며 모두들 먼저 나가려고 서두릅니다. 문득 무척을 한 번 내려치자 모든 소리가 끊기고, 병풍을 걷자 사람 하나, 탁자 하나, 의자 하나, 부채 하나, 무척 하나뿐이었습니다.”


황새 형님과 뱁새 아우

절묘한 구기를 빼어난 문장으로 묘사한 명문이다. 이런 정도까지 구기의 기예가 가능한지 나로서는 의문이 들 만큼 환상적이다. 어쨌든 명청 시대에 구기는 매우 인기 있는 공연의 하나로 정착됐다.

조선 후기에 구기가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과 기록을 통해 그런 현상을 추정할 수 있다. 구기가 성행하자 빼어난 구기 기예를 발휘해 명성이 난 사람들이 등장했다. 우리가 살펴볼 박뱁새가 그런 유명한 예능인의 한 사람이다. <추재기이>에는 박뱁새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뱁새의 형은 ‘황새장사’라고 불리니 넓적다리가 길고 힘이 세기 때문이다. 박뱁새는 신장이 채 세 자가 되지 않고 얼굴 크기는 작기가 대여섯 살 난 아이와 같기 때문에 ‘뱁새’라고 불린다. 뱁새는 구기를 잘해서 입으로는 생황과 퉁소를 불고, 코로는 거문고와 비파 음악을 연주한다. 동시에 함께 연주하되 소리가 즐비하고, 화음을 잘 이루므로 세상에서 아주 빼어난 음악대라고 평한다.”

뱁새라는 이름의 키 작은 사내가 어린아이 같은 용모를 했고, 입과 코로 음악을 연주해 인기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박뱁새로만 부른 것은 뱁새가 그의 별명이자 예명임을 말한다. 박뱁새가 지닌 구기의 특징은 새나 사람의 소리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코와 입으로 동시에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그 음악 소리가 화음을 잘 이뤄 사람들은 매우 빼어난 음악대로 평가할 정도였다.

조수삼은 박뱁새의 구기를 더 이상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특별히 그는 뱁새의 사연에 그의 형을 끼워넣었다. 뱁새와 달리 형은 키가 커서 황새장사, 곧 관협(鸛俠)이라 불렸다. 키가 껑충 큰 한량이었음을 표현한 말이다. 생김새가 너무도 다른 형제는 일반 평민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기보다는 아무래도 기방 주변에서 생활했던 것 같다. 도회지 기방에서 뱁새는 아주 인기 있는 공연의 하나인 구기를 공연하며 생활했고, 거기에서 형은 ‘황새’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그의 보디가드 겸 후원자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추정은 박뱁새를 묘사한 조수삼의 다음 시에서도 엿보인다.


노래도 아니요 휘파람도 아닌 음악이

구름 위 하늘까지 솟구치네.

코에서는 거문고 비파 소리

입에서는 생황과 퉁소 소리.

협객 소굴의 아름다운 음악에는

우스개 이야기가 따라다니니

“형님은 황새 아우는 뱁새라네.”


시의 후반부에 묘사하듯이 이들의 활동 무대는 ‘협객의 소굴’(俠藪)이고, 두 형제는 사람들에게 독특한 대조를 보이는 형제로 소문이 나 있었다. 형까지 음악 공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꺼꾸리’와 ‘장다리’처럼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하는 연출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도 있다. 정통적인 음악과는 달리 이러한 구기의 음악 연주는 사람들의 웃음을 동반하는 대중적 요소를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박뱁새는 구기의 예능을 공연함으로써 생활하는 전문인이었다. 다시 말해 취미로 구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기를 전문적 예능으로 공연하고 돈을 버는 직업인이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이러한 전문적 예능인의 활동 무대가 도회지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또 하나의 좋은 사례가 바로 군할(君瞎)이라는 구기 전문인이다. 그에 관한 사연은 필자가 3년 전에 발굴해 소개한 <녹파잡기>(綠波雜記)란 책에 전한다.

“군할이라 하는 사람은 퉁소를 잘 분다. 입에 닿는 대로 불어도 자연스럽게 음률에 들어맞는다. 고금의 가곡을 불기만 하면 저마다 대단히 정교하고 오묘하다. 또 온갖 새 울음소리를 흉내내는데 온 좌석이 그 소리를 듣고 뒤로 자빠진다. 과부의 곡소리를 흉내내면 애원하는 소리가 처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떨구게 만든다. 개성과 평양 사이를 오가는데 다투어 그를 초치하여 거의 비어 있는 날이 없다. 모두들 군할이 드물게 찾아오는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일제까지 명맥 유지

1810~20년대 평양의 기방 풍경을 묘사하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군할이란 이름으로 보아 장님인 듯하고, 박뱁새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박뱁새가 한양을 주 활동 무대로 삼았다면, 군할은 평양과 개성을 주 활동 무대로 삼았다. 군할은 퉁소를 연주하는 음악가이지만 그의 특기는 구기에 있었다. 박뱁새와는 달리 그는 온갖 새 울음소리를 흉내내고 과부의 곡소리를 흉내내는 성대모사를 주특기로 했다. 군할의 빼어난 구기 솜씨에 반해서 평양과 개성의 기방에서는 번갈아 그를 초청해 공연하게 했다. 공연 일자가 꽉 차서 하루도 빈 날이 없었다고 하니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만하다.

이렇게 기방을 무대로 구기 공연을 하는 직업적 예능인은 정통 예술인과는 구별되는 대중적 민간예술인으로서 대중의 기호에 맞는 공연을 했다. 한편, 이들 직업인과는 달리 취미로 구기를 하는 인물들도 여러 기록에 등장한다. 구기가 흥미로운 취미로 널리 퍼진 당시 사회상을 엿보게 한다. 그 가운데 하나의 사례가 성호 이익 선생의 조카인 이철환이 쓴 <상산삼매>(象山三昧)란 책에 등장한다.

이철환은 1753년에 예산의 가야산에 올랐을 때 절에서 회잠(會岑)이라는 17살의 사미승이 구기의 재능을 펼치는 장면을 목도했다. 회잠이 입술을 모아 입김을 불어 나각(螺角)과 유사한 소리를 잘 냈고, 자연스럽고 교묘한 소리가 법당을 가득 메웠다고 전했다. 그는 전에도 어떤 선비가 입으로 거문고 음악을 멋지게 연주한다는 소문을 듣고 꼭 만나려 했다고 밝혔다. 구기를 천박한 기술로 보는 시각이 없이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나 인기를 구가한 구기는 20세기 들어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사정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만 해도 전문 구기 연예인은 명맥을 유지했다. 박춘재(1881~1950)라는 경기와 서도 소리를 잘하는 명창이 하나의 사례이다. 그는 한국 최초로 레코드를 취입한 이요, 일제 초엽의 저명한 음악인이다. 그리고 이른바 ‘재담소리’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이 재담소리는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됐다. 그가 1910년대 초반에 녹음한 레코드에는 <각색 장사치 흉내>나 <각색 장님 흉내> <개넋두리> 같은 레퍼토리가 있는데 이는 재담소리의 일종이면서 실제 내용을 보면 구기 공연이다. 앞서 군할이 과부의 곡소리를 흉내낸 기능이나 다를 바 없다. 박춘재는 박뱁새와 군할의 뒤를 화려하게 장식한 마지막 구기 예술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