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정민의 세설신어 [57] 살풍경(殺風景)

바람아님 2014. 1. 28. 10:20

(출처-조선일보 2010.06.03 정민 한양대교수·고전문학)


당나라 때 이상은(李商隱·812~858)의 '잡찬(雜纂)'에 '살풍경(殺風景)' 시리즈가 나온다. 
못 봐줄 꼴불견을 여럿 나열했다. 책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른데 다 모아보니 이렇다. 

첫 번째가 '송간갈도(松間喝道)', 소나무 숲길에 갑자기 "물렀거라" 외치며 등장한 벼슬아치다. 운치 없는 녀석! 
두 번째는 '간화루하(看花淚下)'다. 꽃 보다 말고 눈물은 왜 짜나? 
세 번째가 '태상포석(苔上鋪席)', 즉 이끼 위에 자리 깔기다. 그냥 앉지. 
네 번째는 '작각수양(斫却垂楊)', 시선을 가린다고 수양버들을 베는 행위다. 몰취미하기는. 
다섯 번째는 '화상쇄곤(花上曬裩)', 꽃 위에 속옷 널어 말리기다. 만행이 따로 없다.

여섯 번째는 '유춘중재(游春重載)', 먹을 것 잔뜩 싣고 나서는 봄나들이다. 몸만 가지. 
일곱 번째가 '석순계마(石筍繫馬)', 종유석 기둥에 말고삐를 묶는 짓이다. 부서지면 어쩌려고. 
여덟 번째는 달빛 아래 횃불 드는 '월하파화(月下把火)'다. 하나마나 한 짓. 
아홉 번째는 '기연설속사(妓筵說俗事)', 기생과 노는 술자리에서 세속사 말하기다. 못난 놈! 
열 번째는 '과원종채(果園種菜)', 과수원에 배추 심기다. 흐이구!

열한 번째가 '배산기루(背山起樓)'다. 으리으리한 누각에 가려 정작 산이 안 보인다. 참 잘났다. 
열두 번째는 '화가하양계압(花架下養鷄鴨)', 꽃 시렁 아래 닭 오리 기르기다. 아! 시끄러워. 
열세 번째는 '청천탁족(淸泉濯足)', 맑은 물에 발 씻기다. 저는 시원하겠지. 
열네 번째는 '분금자학(焚琴煮鶴)', 거문고 때서 학 삶기. 무식한 자식! 
열다섯 번째는 '대화철다(對花啜茶)', 꽃 보며 차 마시기다. 꽃구경이나 하지.

그래도 이런 것은 애교가 있다. 오늘의 살풍경은 어떤가? 
버스 타고 음주가무, 산에 가서 고기 굽고, 지하철의 고성 전화, 패륜녀의 잇단 등장. 
입법하는 국회에선 툭하면 무법 활극, 법 지키라 으름장 놓고 뒤로는 접대향응. 똥 뀐 놈이 성을 내고, 못난 짓 후 자화자찬. 
4대강엔 바야흐로 보 쌓기가 한창이다. 
이상은의 '잡찬'에는 '불상칭(不相稱)', 즉 걸맞지 않은 일 시리즈도 있다. 
병이 든 의원, 글자 모르는 선생, 푸줏간에서 염불하기와 창가(娼家) 찾는 늙은이, 어깨가 떡 벌어진 신부(新婦) 등등. 
하지만 이런 것은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아! 살풍경스럽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