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홍도 ‘마상청앵’ 종이에 연한 색, 117.2×52㎝, 간송미술관 |
황금빛 수양버들이 한가로운 냇가에 갔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수양버들의 몸짓이 태평무를 추는 무녀의 팔사위처럼 현란하면서도 우아하다. 냇가 건너편 길은 며칠 전 천둥 번개로 패대기쳐진 벚꽃으로 난장판이다. 애써 피워 낸 꽃을 생짜로 떨어뜨린 벚꽃은 붉은 꼭지 속에 버찌를 키우며 미련 없이 본질을 향해 돌진하는 중이다. 뿌리 내린 생명들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 봄은 지금 몸살을 앓을 정도로 격렬하게 생을 충동질하고 있다. 평일 오전이라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이미 은퇴한 듯한 남자들이 몇몇 짝을 지어 걷고 있었고 강아지를 데리고 걷는 주부도 눈에 띄었다. 대부분 피 말리는 경쟁 속에 직접 발을 담그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만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말 타고 가다 봄의 소리를 듣다
그림 속 선비도 봄을 찾아 나선 것일까? 김홍도(金弘道·1745년~?)가 그린 ‘마상청앵(馬上聽鶯·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다)’은 이즈음 풍경이다. 시자(侍者)가 끄는 말을 타고 가던 선비가 언덕길에서 새소리를 들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올 때부터 줄곧 들려오던 새소리의 근원을 찾아보니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노란 꾀꼬리 두 마리가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그냥 스쳐 지나갈까 하다가 그 노는 모습이 하도 다정하여 잠시 말을 멈춰 서서 뒤돌아본다. 봄날의 시정(詩情)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작품이다.
나무 그늘이 만들어 놓은 공간 아래 주제가 되는 인물을 그려 넣는 구도는, 예로부터 작가들이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를 그릴 때 흔히 쓰는 고전적 수법이다. 김홍도는 이 작품에서 전통적 구도를 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새롭게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이유는 화면을 운용하는 탁월한 감각 때문이다. 선비가 고개를 돌려 꾀꼬리가 앉아 있는 버드나무를 쳐다보자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선비의 시선을 따라간다. 주인공은 분명히 말 탄 선비인데 선비의 시선을 통해 교감을 나눈 버드나무와 꾀꼬리의 존재가 부각된다. 시선 처리가 그만큼 중요하다. 선비의 시선은 선비와 꾀꼬리와 관람자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 매개체다. 기존의 소경산수인물화 속의 나무가 그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무대장치에 불과했다면 ‘마상청앵’에서의 버드나무는 주인공만큼 중요해졌다. 기존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막힌 화면 구성이다.
감탄할 것이 어디 구도뿐이랴. 필법과 묵법 또한 절묘하다. 가는 선묘로 처리한 인물과 몰골법(沒骨法·형태의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바로 먹이나 물감으로 그리는 화법)으로 그린 말의 대비가 그만이다. 선비와 시자가 입은 옷은 선으로 그려 몸을 감싸고 있는 의복의 기능을 강조했다. 반면 몰골법으로 그린 말에서는 부드러운 털의 질감이 느껴진다. 이런 대비는 버드나무에서도 반복해서 적용되었다. 두꺼운 껍질로 뒤덮인 줄기의 아랫부분을 구륵법(鉤勒法·형태의 윤곽을 선으로 그린 다음 그 가운데를 색칠하는 화법)으로 그려 연륜을 표현했다면, 연녹색 잎사귀가 돋아난 가지는 몰골법으로 그려 연약함을 보여주었다. 이런 안정된 구도 속에서 말과 버드나무와 꾀꼬리에 칠한 연한 물감이 길가에 자라난 풀과 맞물려 봄의 운치를 더해준다.
선비의 눈을 통해 본 버드나무와 꾀꼬리
버드나무 위의 꾀꼬리를 쳐다보고 있는 선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그림을 볼 때마다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길을 가던 선비가 새소리에 무심히 고개를 돌려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유자적한 선비가 봄나들이 삼아 자연을 감상하며 시를 짓는 장면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럴 때 그림 속 주인공의 행동은 넉넉한 집안 양반의 유한 취미 정도로 비쳐진다. 상단에 적힌 이인문(李寅文·1745~1821년)의 제시도 여유로운 사람의 넉넉한 삶의 운치를 암시하고 있다.
‘가인은 꽃 아래에서 천 가지 피리 소리를 듣고(佳人花底簧千舌),
시인은 술독 앞에서 한 쌍의 귤을 보는구나(韻士樽前柑一雙).
언덕 위 버드나무를 어지러이 누비는 저 꾀꼬리(歷亂金梭楊柳岸),
안개와 비를 엮어 봄의 강을 짜누나(惹烟和雨織春江).’
제시를 쓴 이인문은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를 그린 사람으로 김홍도하고는 아주 가까웠다. 김홍도는 때때로 이인문, 김응환(金應換), 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강희언(姜熙彦)의 집에 모여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러니만큼 ‘마상청앵’에 제시를 쓸 때도 김홍도의 제작의도를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이인문이 쓴 제시에서는 봄날을 완상하는 선비의 넉넉한 인기척이 느껴진다.
그게 전부일까? 목소리 고운 꾀꼬리 소리에 반한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굳이 다른 나무도 아닌 버드나무 위에 앉은 새를 보고 있는 선비의 마음은 어떠할까. 버드나무는 한시(漢詩)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특히 이별의 장소에는 어김없이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다. 왕유의 시에도 정지승의 시에도 정몽주, 서거정, 이정구의 시에도 버드나무는 이별의 슬픔으로 울먹거리며 측은하게 서 있다. ‘천안삼거리 흥~능수야 버들은 흥~’으로 시작되는 민요 속의 천안삼거리에도 버드나무가 있다. 세 갈래 길로 갈라지는 삼남대로의 분기점에 버드나무를 심은 뜻은 거꾸로 꽂아도 살아나는 버드나무처럼 어딜 가더라도 건강하라는 격려가 담겨 있을 것이다. 헤어지는 사람이 정인(情人)이라면 ‘잠자는 창밖에 심어 두고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라고 했던 기생 홍낭의 연정일지도 모른다. 혹은 이건 어떠한가.
‘수양버들 시냇가에 비단 빨래 하노라니
흰 말 탄 선비님이 손 잡으며 정을 주네.
손 끝에 남은 향기야 차마 어이 씻으리.’
- 이제현 ‘손 끝에 남은 향기’(손종섭 해석)
비단 빨래를 하는 것을 보니 화자(話者)는 여인일 것이다. 흰 말 탄 선비가 지나가다 여인의 손을 잡았다. 길 가던 사람이야 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손을 잡힌 여인은 님에 대한 생각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혹시 그림 속의 선비가 방금 전에 빨래터를 지나갔던 사람은 아닐까. 장난 삼아 한 행동이었는데 버드나무 위에 앉은 꾀꼬리를 보자 그녀가 떠올랐을 것이다. 유리왕(瑠璃王)이 지은 황조가(黃鳥歌)에서처럼 ‘펄펄 나는 저 꾀꼬리’가 암수 서로 정다운 것을 보고 갑자기 외로워졌는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버드나무 위의 꾀꼬리는 떠나간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오늘도 그림 속에서 인생을 만나다
버드나무를 보며 걷다 보니 냇가 곁에 뒷산으로 길이 나 있는 삼거리까지 왔다. 산에 오를까 말까 잠시 망설이며 서 있는데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 또래쯤 되었을까. 그는 이제 막 산을 향해 오르려는 듯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메고 서 있었다. 삼거리 길에 심어진 버드나무에는 꾀꼬리 대신 까치가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는 스틱을 짚고 서서 그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평일 오전인데도 출근을 하지 않은 것을 보니 팔자 좋은 사람이군. 그렇게 생각하면서 돌아서려다 말고 나는 그 자리에 딱 멈춰서고 말았다. 아, 수심이 가득한 그의 표정이라니. 몇 년 전에 남편이 실직했을 때 봤던 바로 그 표정이 아닌가. 그때 남편은 버드나무가 피는지, 지는지도 모를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할 사람이 하루 종일 산을 오르내리며 건조하게 봄소식을 전해주었다. 저 남자도 그러겠지. 그림 속의 인물도 그랬을까. 그러고 보니 어쩐지 눈빛이 슬퍼 보이더라니. 삭탈관직되어 낙향하는 길에 암담한 심정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더란 말인가. 진심으로 그림을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이여. 막막한 인생을 헤쳐 나가는 것의 지난함이여. 오늘도 나는 그림 속에서 인생을 만나는구나.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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