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의 묘소
대지에는 까마득히 호겁(浩劫)의 재난 한창이고
서대(西臺)*에는 달도 지고 저문 강엔 날이 차다.
지금 붓을 잡은들 땅이 없어 시름하노니
봄바람이나 그리고 난초는 그리지 말자.
梅泉墓(매천묘)
大地茫茫劫正蘭(대지망망겁정란)
西臺月落暮江寒(서대월락모강한)
秖今筆下愁無土(지금필하수무토)
但畵春風莫畵蘭(단화춘풍막화란) —이건방(李建芳·1861~1939)
구한말의 항일 우국지사 이건방이 매천 황현(黃玹·1855~1910) 선생의 묘소에 올라 시를 지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매천의 묘소를 홀로 올라 참배하고 사방을 둘러보니 어둠에 묻힌 대지는 온통 큰 재난의 기운에 뒤덮여 있다. 망국을 개탄하며 자결한 지사의 무덤은 어둡고 춥다. 그 앞에서 나 같은 글쟁이는 무엇을 써야 하나?
선비의 고결한 자태를 상징하는 난초는 그리지 말자.
난초는 땅을 함께 그려야 하건만 국토(國土)를 잃은 망국민의 처지가 아닌가?
일단 땅을 밟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봄바람이나 그리자. 땅을 되찾는 그날에는 난초를 멋지게 그리리라.
매천의 무덤 앞은 땅을 잃은 무토(無土)의 지사가 울분을 토해내기 좋은 곳,
고결하고 매서운 두 지사(志士)의 영혼에 옷깃이 여며진다.
*서대: 중국 송나라의 충신 사고(謝皐羽)가 원나라에 패해 죽은 문천상(文天祥)을 애도한 장소.
(출처-조선일보 2012.11.16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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