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李珥)
구곡은 어디인가 문산에 한 해가 저무누나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혔는데
노니는 사람은 아니 오고 볼 것 없다 하더라
▲ 이의성 ‘구곡문산도’ 19세기, 60.3×35.2㎝. 종이에 색, 국보 제237호, 개인 |
한양 생활을 접고 해주로 이사왔다. 오랫동안 노래처럼 부르던 ‘귀거래사’를 비로소 실천에 옮겼다. 번잡한 도회지를 벗어나니 마음이 한가롭다. 다시는 북적대는 도시로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조금 더 많이 그러모으기 위해, 최대한 빨리 승진하기 위해 머리 뚜껑을 열었다 닫는 어리석은 인생을 연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많이 지쳤으니 이제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마음을 넉넉하게 채우겠다.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 미뤄두고 읽지 않은 책을 다시 펴 성인의 말씀에 귀 기울이리라. 마음껏 공부한 후 생각이 깊어지면 아끼는 제자를 불러 후덕한 대화도 나눌 수 있으리.
설레는 마음으로 낙향해 짐을 풀고 나서도 한참은 고요함이 낯설었다. 느린 시간에 익숙해질 때까지 없는 구실을 만들어 하릴없이 문지방을 들락거렸다. 바람에 떨어진 꽃잎을 쓸어냈다. 낙엽 진 자리에 두둑한 눈이 얹혔다. 자분자분 걸으며 계절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산과 계곡이 시나브로 마음을 열었다. 산책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관암에서 시작된 산책 코스는 화암(花巖), 취병(翠屛), 송애(松崖), 은병(隱屛), 조협(釣峽), 풍암(楓巖), 금탄(琴灘)을 지나 문산(文山)까지 이어졌다. 느긋한 걸음으로 돌아다닐수록 이곳만 한 별천지는 없지 싶었다. 주자(朱子·1130~1200) 선생이 도학(道學)을 집대성한 무이구곡(武夷九曲)이 이런 풍광일까. 지루해질 만하면 신기하게도 빼어난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옳지, 내가 벗들에게 꽃을 띄워 아름다운 이곳에 오게 해야지. 율곡(栗谷)은 붓을 들어 고산구곡의 흥취를 읊은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써내려갔다. 한글로 지은 시조였다.
고산의 아홉 굽이 계곡에 반한 율곡
벌써 한 해가 저문다. 산그늘에도 한 해의 끝자락이 덮였다. 문산은 구곡의 마지막 명소로 기암괴석이 멋있다. 멋있으면 뭐하나. 눈이 덮여 진경을 알 수 없는 것을. 문산의 참모습을 보려면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조급증에 걸린 세상 사람들은 와 보지도 않고 볼 것 없다고 단정해버린다.
율곡 이이(李珥·1536~1584)는 34세(1569)에 교리(校理)에서 물러나 황해도 고산군 해주의 석담에 은거한다. 2년 뒤에는 고산구곡을 둘러보며 아홉 군데의 계곡에 이름을 붙였다. 갓머리처럼 생긴 바위는 ‘관암(冠巖)’, 꽃이 흐드러진 계곡의 바위는 ‘화암(花巖)’, 푸른 병풍이 둘러친 듯한 계곡은 ‘취병(翠屛)’…. 계곡은 계속됐지만 아홉 개만 선정했다. 이유가 무엇인지 서곡에서 밝혔다.
‘고산의 아홉 굽이 계곡을 사람들이 모르더니
풀을 베고 집 짓고 사니 벗님네 찾아오네
아아, 무이를 생각하고 주자를 배우리라’
조선은 주자성리학을 국시로 했다. 남송(南宋)의 신 유학자 주희는 성리학의 종주로서 많은 지식인의 존경을 받았다. 율곡도 예외는 아니었다. 계곡에 이름을 붙일 때도 주자를 생각할 정도로 ‘주자 선생님’에 대한 흠모의 정은 강렬했다. 율곡은 사람들이 고산 계곡의 뛰어난 경치를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고산구곡가’를 지은 것은 아니다.
그 바탕에는 주희가 있었다. 주희는 복건성(福建省) 무이산에 있는 무이구곡에 정사(精舍)를 짓고 은거하며 저술 작업과 강학을 겸했다. 그는 자신의 은거처인 무이산의 기이한 절벽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어 찬탄했다. 주희에게 있어 ‘무이도가’는 자연경관을 노래한 시였으며 도학의 단계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존경하는 주자 선생님’을 흠모하고 따른 사람들은 ‘무이도가’의 배경이 된 ‘무이구곡도’를 그려 돌려보면서 ‘주자 대하듯’ 했다. 주희의 초상화 대신 ‘무이구곡도’가 존경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다. 율곡이 구곡을 거니는 행위는 단순히 감상을 위한 유람이 아니었다. 학문이 깊어지는 과정을 비유한 것이다. 마치 주희가 그랬던 것처럼.
중국의 ‘무이구곡도’는 16세기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이황(李滉·1501~1570)은 성리학의 대가답게 ‘무이구곡도’를 가장 먼저 접했다. 이후 중국의 ‘무이구곡도’를 답습한 듯한 그림이 여러 점 제작되었다. 그런데 17세기에 들어 ‘구곡도’ 제작에 일대 혁신이 일어난다. 조선식 구곡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먼 과거의 스승님인 주자 대신 바로 자신들의 직계 스승님이 머물던 실제 공간에 구곡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송시열의 화양구곡(華陽九曲), 권상하의 황강구곡(黃江九曲) 등이 그것이다. 율곡(栗谷)의 고산구곡(高山九曲)은 조선식 구곡도의 출발점이었다.
10명의 화가, 성리학을 그리다
이의성(李義聲·1775~1833)이 그린 ‘구곡문산도(九曲文山圖)’는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畵屛)’ 중 아홉 번째 계곡 ‘문산’이다. 율곡의 ‘고산구곡가’의 마지막 경치다. ‘고산구곡시화병’은 모두 12폭으로 된 병풍이다. 1폭과 12폭에는 그림이 없고 글만 적혀 있는데 나머지 10폭은 각기 다른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다. 화가들은 김홍도, 김득신, 이인문, 윤제홍 등 당시 화단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재노와 문경집처럼 미술사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생소한 작가도 포함되어 있다. 이의성 역시 최근에야 조명받은 작가다.
율곡은 고산구곡을 지정하고 시조를 지었지만 그림이 그려진 것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특히 노론의 핵심 인물인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주도적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각 그림에는 율곡의 한글 ‘고산구곡가’ 뒤에 우암이 한역(漢譯)한 시가 첨부되어 있다. 율곡의 학맥을 이은 선비들을 단합시키기 위한 조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율곡은 왜 마지막 계곡을 ‘문산(文山)’이라 했을까. 문산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승경은 장소의 풍경이 느껴지도록 명명했는데 구곡에서만 유독 형이상학적인 이름을 고집했다. 문산은 문학의 산인가, 문인의 산인가. 아니면 문리가 트이는 산이나 문기가 넘치는 산일까. 문장이나 문재를 뜻할 수도 있나. 어떤 경우든 학문(學文)을 생각하며 이름 붙인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학문(學文)은 묻고 배우는 ‘학문(學問)’과 달리 주역(周易), 서경(書經), 시경(詩經), 춘추(春秋), 예(禮), 악(樂) 등 시서육예(詩書六藝)를 배우는 것을 뜻한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공부해야 할 필수 과목이다. 그러니 눈 덮인 문산을 보고 볼 것 없다 하는 사람은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의성이 문산을 그리면서 특별히 눈에 띄지 않게 잔잔한 필치를 선택한 것은 학문의 산은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공부이니 평생 아홉 굽이 계곡에 묻혀 살아도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뛰어난 인재가 산속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율곡은 고산구곡에서 그다지 길게 앉아 있지 못했다. 한양에 돌아간 후 휴가차 이따금 들렀을 뿐이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덕분에 우리는 멋진 시와 그림을 얻지 않았는가.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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