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성소상’, 작자 미상, 1904년, 목판에 채색, 27.6×37.8cm. 장서각 |
어느 날 안회가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라도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에 돌아갈 것이다. 인을 행하는 방법은 자기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어찌 다른 사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겠는가?”
안회가 다시 세부적인 항목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非禮勿動).”
그러자 안회가 대답했다.
“제가 비록 총명하지는 못하지만, 이 말씀을 받들겠습니다(回雖不敏, 請事斯語矣).”
‘논어’의 ‘안연’ 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워낙 유명한 문장이라 중학교 한문 시간에 외웠던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구절은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가 아니다. 안회의 대답이다. 총명하지는 못하지만 스승의 뜻에 따르겠다는 한마디에 옛사람 안회의 사람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초상화는 여러 가지 형식이 전한다. 공자가 두 손을 맞잡고 서 있는 모습(行敎圖). 제자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는 모습(憑几像). 큰 수레를 타고 가는 모습(乘輅像). 홀을 들고 서 있는 모습(聖像). 사구라는 벼슬을 할 때의 모습(司寇像). 면류관을 쓴 정면상(大成至聖文宣王之像) 등 다양하다. 그중에서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의 처음 부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모습이 공자가 두 손을 맞잡고 서 있는 ‘행교도’다. ‘행교도’는 공자가 홀로 서 있을 때도 있지만 공자 뒤에 젊은 제자가 한 명 서 있는 모습이 더 자주 등장한다. 그 제자가 안회(顔回)다.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받자 “총명하지는 못하지만 스승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던 그 사람이다. ‘선성소상(先聖小像·옛 성인의 작은 초상)’은 수많은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에서 찾아볼 수 있는 ‘행교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사마천은 ‘사기’의 ‘공자세가’ 편에서 공자의 제자가 총 3000명에 달한다고 전한다. 공자는 제자를 받아들일 때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누구든지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속수(束脩)’를 바치는 것으로 충분했다. ‘속수’는 육포 열 가닥을 묶은 것으로 스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수 있는 선물이었다. 그 전통이 남아 조선시대 때 성균관, 향교, 서당 등에서 입학식 때 학생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예절을 ‘속수례’라고 했다.
3000명의 제자 중에서 공자가 인가한 수제자는 모두 77명이었다. ‘중니제자열전’에는 “내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에서 학문에 능통한 자가 77명 있는데 그들 모두가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그 많은 제자 중에서 안회는 항상 공자의 바로 뒷자리에 위치해 있다. 공자뿐 아니라 후대의 유가(儒家)들까지도 안회를 ‘수제자’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안회는 ‘논어’에 21회 등장한다. 등장 횟수로는 자로(子路·42회)와 자공(子貢·38회)에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회는 두 사람을 제치고 공자의 ‘수제자’로 발탁되었다.
안회는 가난했다. 가난했으나 그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는 한 통의 대나무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추한 골목에 살면서도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공자는 안회가 ‘거의 도를 터득했지만 자주 쌀통이 빌 정도’였다고 안타까워했다.
안회는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줄만 알았지 반박할 줄 모르는 안회를 보고 공자마저 제자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그가 물러간 뒤 홀로 지내는 것을 살펴보니 스승의 가르침대로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안회가 스승에게 배워서 실천한 가르침은 ‘인(仁)’이었다. 공자는 ‘안회가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공자는 안회의 실천력을 보고 “나는 그가 나아가는 것은 보았어도, 그가 멈춘 것을 보지 못했다”고 감탄했다. 그런 실천력은 자공은 물론 공자 자신도 따라갈 수 없는 덕목이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지만 스승을 스승 되게 만드는 사람은 제자다. 공자는 완전한 믿음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를 보며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안회는 공자가 약해질 때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한번은 공자가 주유열국하는 도중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길이 막혀 칠 일 동안 굶은 적이 있었다. 상심한 공자가 탄식하면서 자신의 도가 그릇된 것인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안회는 단호한 어조로, 스승님의 도가 너무 커서 천하가 그 도를 수용하지 못할 뿐이라고 위로했다.
안회가 공자를 절대적인 믿음으로 공경했다면 공자는 안회를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했다. 안회가 곁에 없으면 크게 걱정했다. 공자가 광(匡) 땅에서 갇히게 되었는데 안회가 뒤처졌다. 걱정이 된 공자가 안회를 보고 반가워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고 말하자 안회는 “선생님께서 살아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자신의 법도를 이어받을 사람이 안회라고 생각했다.
이런 안회가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마흔이 안 된 나이였다.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크게 상심했다. 공자가 곡을 하며 상심이 깊어지자 모시고 있던 사람이 걱정을 했다. 그러자 공자는 대답했다.
“그를 위해 상심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하겠느냐?”
공자가 안회를 편애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제자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명문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공자 스스로가 밝힌 공자 자신은 “열 가구가 사는 고을에도 반드시 성실과 믿음이 나와 같은 자가 있겠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듯이 대단한 호학자(好學者)였다. 안회는 공자의 호학하는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 공자는 애공(哀公·노나라 군주)이 제자들 가운데 누가 배우기를 좋아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안회라는 자가 있어 배우기를 좋아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목숨이 짧아 죽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자가 없으니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을 듣지 못했습니다.”
혼란한 시절에 칼과 창이 아닌 예와 인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공자의 사상은 당시 모든 군주들에게 외면받았다. 그런데 안회는 스승의 가르침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실천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안회의 믿음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됐다. 공자는 안회 같은 순정한 제자가 있어 자신의 사상을 견고하게 전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선성소상’에는 유가의 학맥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역사가 담겨 있다.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아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귀한 모습이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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