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그림으로 읽는 공자]공자, ‘야합(野合)’으로 태어났다?-야합·니산치도

바람아님 2014. 3. 8. 10:55
▲ ‘야합’ 작자 미상, 사천성 성도 신룡향 출토 한나라 화상전
    밝은 대낮에 두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다. 문 닫힌 방 안이 아니라 야외의 우거진 나무 아래서다. 차분하게 준비한 만남인 듯 벗은 옷은 가지런히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뜨거운 피가 끓는 두 남녀는 이내 한 몸처럼 뒤엉켰다. 바구니를 내팽개친 여인은 누운 채 두 다리를 벌려 남자의 어깨에 걸쳤다. 무릎 꿇은 남자는 발기된 성기를 여인에게 삽입하기 직전이다. 은밀해야 할 장소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남자 뒤에서 키 작은 남자가 두 손으로 성교하는 남자의 엉덩이를 밀고 있고 그 뒤에는 또 다른 남자가 서 있다. 키 작은 남자나 서 있는 남자나 모두 발기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고 원숭이 두 마리가 꽥꽥거려도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주위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사천성 성도에서 출토된 한(漢)나라 때 화상전(畵像塼)의 모습으로 그림의 제목은 ‘야합(野合)’이다. ‘좋지 못한 목적으로 서로 어울리거나 서로 정을 통하는 행위’를 야합이라 한다.
   
   성스러운 성인(聖人) 공자의 탄생과 관련해 ‘야합’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낸 이유는 이 문제가 오랫동안 뜨거운 감자처럼 논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야합’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은 사마천이었다. 사마천은 저서 ‘사기’의 ‘공자세가’ 편에서 공자의 탄생을 이렇게 기록했다.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송나라 사람으로 공방숙이라고 한다. 방숙이 백하를 낳았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흘(紇)은 안씨(顔氏) 딸과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으니, 니구(尼丘)에서 기도를 하여 공자를 얻은 것이다. 노나라 양공 22년 공자가 태어났다.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머리 정수리가 낮고 사방이 높아 이로 인해 이름을 구(丘)라 했다. 그의 자는 중니(仲尼)고 성은 공씨(孔氏)다.’
   
   사마천은 위대한 성인 공자의 탄생을 ‘야합’이라는 아리송한 단어로 표현하면서 일체의 설명을 생략했다. 그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갖가지 추측과 항변으로 공자의 탄생에 대한 설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야합’은 문자 그대로 ‘야합’일 뿐이다. ‘야외(野)에서 결합(合)한다’는 뜻이다. 사마천이 살던 시대의 ‘야합’은 지금처럼 그렇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의적이고 생산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가뭄이나 홍수를 막기 위해 남녀가 큰 나무가 있는 곳에서 연애와 성행위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때 나무는 주술적인 제의가 이루어지는 사당과 비슷한 신성성을 지닌다. 즉 남자(양)와 여자(음)의 결합이 천지의 교감을 얻어 비를 내리게 하고 홍수를 멈추게 한다고 믿었다. 신령스러운 나무 아래서 성스러운 행위를 하는 것이 제지되기보다는 오히려 장려되었다. 그래서 강물의 얼음이 풀리는 ‘중춘 때에는 남녀들이 만나는 것을 허용하였는데 이때에는 남녀가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 누구도 막지 않았다’고 ‘주례’의 ‘지관, 매씨’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 풍습이 사마천(BC 145년~BC 85년경)이 살던 한(漢)대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다. 사마천이 성스러운 분의 탄생을 언급하면서 ‘야합’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쓴 것은 결코 공자를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요즘 우리가 자주 쓰는 ‘정치적 야합’이니 ‘담합’이니 할 때의 부정적인 의미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배경을 알고 나면 ‘숙량흘이 안씨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는 사마천의 문장에 민감하게 반응한 ‘공자가어’의 변명이 오히려 의아하게 느껴진다. 즉 ‘공자의 부모가 나이 차가 많이 나 정식으로 혼인을 치르지 못하고 절차도 제대로 다 밟지 못한 것으로 믿고 싶어한’ 강박관념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림으로 읽는 공자의 생애를 기록한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에는 ‘행교도’ 다음으로 ‘니산치도’가 실려 있다.
   
   ‘니산치도(尼山致禱·니구산에서 기도하다)’를 살펴보자. 곱게 단장한 여인이 신령스러운 산 앞에 서 있다. 산봉우리에는 흰 구름이 하강하듯 걸려 있다. 여인은 향을 피우려는지 탁자 위에 놓인 향로에 손을 내민다. 그녀 뒤로 시중드는 여인과 쌍상투(雙髻)를 한 동자 두 명이 합장한 채 서 있다. 언덕 곁에는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나무와 꽃들이 조심스럽게 피어 있다. 공교롭게도 그림 속의 계절도 봄이다. 만물이 생명을 향해 피어나는 봄날, 여인은 자신에게도 새로운 생명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한다. 
   

 

 

▲ ‘니산치도’ 작자 미상, 1904년, 목판에 채색, 27.6×37.8㎝ 장서각


   여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붉은색 탁자다. 시중드는 여인이 들고 있는 제기도 붉은 천에 받쳤다. 화가가 굳이 중요하지도 않은 받침대를 가장 중요한 듯 붉은색으로 칠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붉은색이 사악하고 불길한 기운을 쫓아낸다고 믿었다. 궁전과 사당에 유난히 붉은색을 많이 쓰는 이유도 그런 목적 때문이다.
   
   여인이 서 있는 곳은 사당이나 궁궐이 아니다. 귀족의 집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산 밑이다. 그러나 여인에게는 이곳이 사당만큼 신성한 장소다. ‘만세의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을 아들로 점지해달라고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신성함의 표상은 탁자뿐만이 아니다. 구름과 아이들도 특별하다.
   
   구름은 여기가 꼭 높은 곳에 위치한 장소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대 회화에서 구름은 상서로움의 표현이다. 구름은 봉황과 기린, 사슴과 학처럼 하늘이 그 존재를 축복하는 장소라는 것을 의미할 때 등장한다.
   
   쌍상투를 한 아이들도 치밀한 계산에서 그려 넣은 것이다. 동자들은 기도하는 여인의 하인으로 따라온 것이 아니다. 신선계에 사는 선동(仙童)이다. 쌍상투를 한 선동은 수명을 관장하는 ‘수성도(壽星圖)’나 자손번창을 기원하는 ‘백자도(百子圖)’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기원과 축복으로 성인 공자가 탄생했다. 그림 위쪽 빈 공간에는 ‘니산치도’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주나라 영왕 19년, 노나라 양공 20년에 성모 안씨는 노나라 니구산에서 기도했다. 이듬해에 공자가 태어났다. 공자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의 정수리 부분이 움푹 파인 것이 니구산과 닮았다. 그래서 공자의 이름을 구(丘)라 하고 자(字)를 중니(仲尼)라 했다.’(周靈王之十九年, 實魯襄公之二十年, 是年聖母顔氏禱於魯尼丘山, 明年乃生孔子, 旣生首上圩頂象尼丘, 因名丘, 字仲尼)
   
   니구산은 산동성 곡부현 동남쪽에 있다. 원래는 니구산인데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기 때문에 피휘(避諱)하여 ‘니산(尼山)’이라 불렀다. 주 영왕 19년은 BC 553년이다. 공자가 탄생한 해가 주 영왕 21년 BC 551년이니까 안징재가 니구산에서 기도한 지 2년 만에 공자를 낳았다. 오랜 기도 끝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귀한 아들은 귀하게 자라지 못하고 어렵게 자랐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죽어 ‘방산’이라는 곳에 매장했는데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에게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지 않았다. 정식 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야합’으로 얻은 아들에게 떳떳하게 남편의 존재를 알려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야합’이 주술적이고 제의적인 행위였다 해도 야합은 야합이었다. 평범한 결혼생활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의 삶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달프다. 공자의 어린 시절이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