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여의 ‘조두예용’, 1700년, 비단에 색, 32×57㎝ 국립전주박물관 |
사마천의 저서 ‘사기’의 ‘공자세가’ 편에는 공자의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적혀 있다. “공자는 어려서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이를 할 때 항상 제기(祭器)를 늘어놓고 제례를 흉내 내며 놀았다.(孔子爲兒嬉戱,常陳俎豆設禮容)”
이 문장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공자성적도’의 ‘조두예용(俎豆禮容)’이다. ‘조두(俎豆)’에서 조(俎)와 두(豆)는 제물을 담는 그릇이다. 조(俎)는 나무에 칠을 하거나 청동으로 만든 것이고, 두(豆)는 보통 나무로 만들지만 토기나 청동으로 만들기도 한다. 모두 제기로 사용하는 그릇이다. 김진여(金振汝·조선 후기)가 그린 ‘조두예용’은 공자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갈한 건물 앞에서 6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그들 앞에는 탁자 위에 제기가 놓여 있다. 아이들은 제례를 흉내 내며 노는 중이다. 돗자리 위에 선 공자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인 듯 모자를 쓰고 예복을 입었다. 그런데 공자의 몸집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난히 크고 얼굴빛도 검다. 이것은 옛 그림에서 주인공을 강조하기 위해 흔히 쓰는 수법이다. 실제로 공자는 유난히 키가 크고 짱구머리에 얼굴도 못생겼다고 전한다. 마당에는 괴석이 담긴 화분이 있고 그 곁에 학 한 마리가 서 있다. 이곳이 상서로운 공간임을 암시한다.
많은 학자가 공자가 제례를 흉내 내며 놀았다는 사실을 들어 어머니 안징재(顔徵在)가 무녀라고 추정한다. 무녀의 역할이 제사를 주관하는 것인 만큼 그 모습을 본 공자가 어머니의 행동을 흉내 내며 놀았다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가 하는 행동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 특징이다. 공자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살았기 때문에 공자의 제례 놀이는 어머니의 행동을 따라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안징재가 무녀였으리라는 가정은 많은 후대 학자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얻었다. 안징재가 니구산에서 기도를 해서 공자를 낳았다는 이야기 자체가 그녀가 무녀였으리라는 사실에 무게가 실린다.
위대한 성인 공자가 출생이 불분명한 것도 모자라 무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야합’만큼이나 유가(儒家)의 후계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사기’에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조두예용’의 일화가 ‘논어’와 ‘공자가어’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공부를 하거나 활쏘기를 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필이면 제사 놀이를 하는 것이 자칫 무녀의 아들이라는 ‘야사’를 ‘사실’로 인정해버릴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해석이 압권이다. 공자가 어렸을 때부터 제례 놀이를 할 정도로 예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유가의 시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렸을 때 의사 놀이를 한 사람은 커서 의사가 될 확률이 높다는 식으로 침소봉대한 것인데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의 어린 시절까지 굳이 ‘세탁’해야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야말로 공자가 가장 경계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공자의 일생을 여러 장면으로 제작한 ‘공자성적도’는 원(元)대 이후 여러 종류가 제작됐는데 책에 따라 10폭에서 112폭까지 다양한 장면이 들어있다. ‘조두예용’은 매우 중요한 장면으로 인식된 듯 어떤 판본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즉 ‘공자성적도’의 첫 번째 장면에는 항상 ‘선성소상(先聖小像)’이 등장하고 다음에는 안징재가 니구산에서 기도한 ‘니산치도’가 배치된다. 이어 ‘인토옥서(麟吐玉書·기린이 공자 탄신일에 옥서를 토하다)’, ‘이룡오로(二龍五老·두 마리의 용과 다섯 신선이 공자 탄신일에 집으로 내려오다)’, ‘균천강성(鈞天降聖·공자의 어머니가 공자가 태어날 때 천상의 음악을 듣다)’이 뒤를 잇고 ‘조두예용’이 그 다음이다.
김진여의 ‘조두예용’은 중국 원대 왕진붕(王振鵬·1280~1329)이 그린 성적도를 모방한 작품이다. 왕진붕의 ‘공자성적도’는 모두 10폭인데 인물 표현과 색채 묘사가 그 어떤 성적도보다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김진여가 그린 ‘공자성적도’는 판화가 아닌 필사본으로 왕진붕의 작품과 똑같이 10점이다. 조선에서 제작된 공자성적도 중 가장 연대가 오래된 작품인데 화원화가 김진여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수작이다. 김진여가 모델로 삼은 왕진붕의 작품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김진여 자체가 인물화나 초상화에 발군의 솜씨를 발휘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김진여는 조선 후기에 활동한 화원화가로 평양 출신이다. 1708년(숙종 34년)에 왕명으로 ‘곤여만국지도(坤輿萬國地圖)’를 제작했으며 1713년에는 진재해(秦再奚)와 함께 숙종어진 제작에 참여했다. 또한 1720년에는 박동보(朴東普)·장득만(張得萬)·허숙(許淑) 등과 함께 ‘기사계첩(耆社契帖)’(보물 제638호) 제작에 참여했다.
평양에서 활동한 그에 대한 정보는 중국 가는 사신들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12년에 청나라에 다녀온 김창업(金昌業·1658~1721)의 ‘연행일기’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1712년 11월 11일에 ‘평양 화사(畫師) 김진여가 자기가 그린 이여백(李如栢)의 화상을 보여 주었다’로 기록되어 있어 그가 평양에서 이름 있는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진여는 김창업이 청나라에서 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 번 만난다. 1713년 3월 21일자 ‘연행록’에는 ‘기성(箕城·평양 옛 지명) 사람 계운방(桂雲芳), 정찬술(鄭贊述), 김진여 등이 여기에 와서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권상하(權尙夏·1641~1721)가 쓴 ‘한수재집(寒水齋集)’에는 1719년 3월에 ‘김진여가 화상(畫像)을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린 김진여가 평양과 한양을 오가며 화필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두예용’은 아이들의 눈동자까지 방향을 달리해서 그릴 만큼 섬세하게 표현한 가작이다. 이것은 김진여의 ‘공자성적도’가 개인의 주문이 아닌 궁궐이나 국가기관의 의뢰로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고증에 대한 고민이 철저하지 못한 점이 옥에 티다. 건물 안에 있는 탁자 위의 책이 그렇다. 공자(BC 551~BC 479)는 춘추시대 사람이다. 종이는 105년에 동한(東漢)의 채륜(蔡倫)이 발명했다. 공자가 살던 시대만 하더라도 종이 대신 죽간을 썼다. 화가는 그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죽간 대신 책을 올려놓은 것은 공자가 컴퓨터를 치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오류다. 어린 공자가 학문과 예의범절을 배우며 자랐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공부하는 분위기를 생각한 것까지는 좋은데 공자가 살았던 시대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이래저래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인물을 정확히 알기는 쉽지 않다. 공자에 대한 대립된 해석이 가능한 것도 그런 어려움에서 기인한다. ‘조두예용’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도 그러할 것이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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