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성적도보’의 직사승전 |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공자가 세 살 때 죽었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에게 숙량흘의 무덤이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말이 좋아 아들이지 공자는 거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살았다. 공자가 열일곱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어머니를 아버지와 합장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무덤을 알지 못했다. 고심하던 공자는 꾀를 내 어머니의 빈소를 곡부 가는 길에 차렸다. 행여 아버지의 무덤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의 예상대로 추읍 사람 만보(輓父)의 어머니가 숙량흘의 무덤을 알려 주었다.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방산에 가서 두 분을 합장했다.
삼년상을 마친 공자는 열아홉 살에 견관씨(幵官氏) 집안의 여인과 결혼했다. 스무 살에 아들 리가 태어났다. 노나라 임금 소공(昭公)이 잉어(鯉魚)를 보내 득남을 축하했다. 공자는 군왕이 하사품을 내린 것이 영광스러워 아들의 이름을 ‘리(鯉)’, 자를 백어(伯魚)라고 지었다. 백(伯)은 맏아들에게 붙이는 칭호니 이름도 자도 모두 ‘잉어’를 뜻한다. 공자의 기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백어는 오십 세에,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공자는 아들 리 외에 딸을 하나 더 두었다.
젊은 시절 공자는 가난하고 지위가 낮았다. 스무 살에 계손씨(季孫氏)의 위리(委吏)가 되어 창고를 관리했고, 21살 때는 승전(乘田)이라는 낮은 벼슬을 했다. ‘직사승전(職司乘田·가축을 관리하는 벼슬을 얻다)’은 공자가 승전으로 일할 때를 그린 장면이다. 승전은 소나 양과 같은 가축들을 키우고 관리하는 일을 하는 관리다. 공자는 그림 중앙에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소가, 왼쪽에는 양들이 놀고 있다. 공자는 지금 소와 양을 관리하는 관원에게서 하급관리에게 동물의 상태에 대해 진지하게 듣고 있다. 관원들의 철저한 보살핌과 정성으로 소와 양들은 모두 건강하고 통통하게 살이 쪘다.
화가는 화면에서 단조로움을 피하고 변화를 주려는 듯 여러 각도에서 양을 바라보듯 다양한 자세로 배치했다. 마치 한 마리 양을 빙 돌려가면서 보듯 양의 앞면과 옆면과 뒷면을 그렸다. 소도 마찬가지다. 소의 옆 모습과 앞 모습과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소를 탄 목동의 모습도 모자라 소 옆에서 공기놀이를 하는 아이들까지 그려 넣었다. 공자의 생애를 복원한 작가가 ‘직사승전’에 사실성을 불어넣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위리’나 ‘승전’은 벼슬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매우 낮은 자리였다. 공자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집안형편이 어려웠음을 말해준다. 공자 스스로도 ‘나는 젊어서 비천하였으므로 다방면의 비루한 일에 능했다’라고 회상한다. 공자는 자신의 능력을 ‘부풀려 보이려 하지 않았다. 점잖은 사람은 천한 일에 재능이 많을 필요가 없는데 공자는 ‘관직에 등용되지 않았으므로 다양한 재능’을 익히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는 명문가 자제처럼 편안한 관직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다. 그가 창고를 관리할 때 계산이 정확하고 일 처리가 매우 공정했다. ‘위리’는 ‘회계(會計)’를 담당하는 관리를 가리킨다. 승전이라는 낮은 벼슬을 할 때는 가축들은 살찌고 번식하여 그 수가 늘어났다.
비록 가난하게 태어나 천한 일을 해야 했지만 공자는 결코 자신의 처지를 탓하지 않았다. 공자는 ‘부(富)라는 것이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채찍을 들고 길을 트는 자라도 나는 또한 할 것이다’라고 가난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만일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따르겠다’고 삶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보여준다. 부와 권력, 명예에 대한 자세가 어떠했는지는 다음의 얘기로도 확인할 수 있다.
“부유함과 귀함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그것이 정당하게 얻은 것이 아니면 누려서는 안 된다. 가난함과 천함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지만 그것이 정당하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
공자는 자신의 빈곤한 환경을 원망하는 대신 그 안에서 자족하고자 했다. 공자는 ‘거친 밥을 먹고 차가운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그것을 베개로 삼으면 즐거움도 그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의롭지 못하면서 잘살고 귀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 뜬구름 같은 것이다’는 자세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런 자세가 있었기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공(司空·공사나 땅을 관장하는 관직)이 되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와 선택이다. 똑같은 어려움을 당해도 누구는 그 환경을 경험 삼아 도약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누구는 그 환경을 탓하며 원망하고 주저앉아 버린다. 공자는 청년 시절의 삶이 매우 험난해 ‘사회 밑바닥 사람들이 하는 일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는 군자로 살겠다는 자신의 길에 대한 투철한 확신이 서 있었다.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으며, 일을 처리함에 신속하고 말하는 데는 신중하며, 도가 있는 곳에 나아가 스스로를 바로잡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야말로 진정한 군자였다. 공자는 ‘선비가 도에 뜻을 두면서 허름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한다면 그와는 더불어 논의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바로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공자가 고귀한 영혼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가정형편이 가난했던 만큼 공자는 유명한 스승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공자성적도’에는 공자가 일곱 살 때 제(齊)나라의 재상이었던 안평중(晏平仲·?~기원전 500)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는 항목이 들어있지만 이것은 어떤 책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는 독학하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그것을 추구한 사람이다’는 말이 그런 공자의 학문 자세를 보여준다.
공자는 남들과 비교해서 결코 나을 것이 없는 형편이었다. 공자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의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이 부족한 점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즉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능력 없음을 걱정하라’는 주문이다. 삶에 대한 공자의 절대 긍정은 학연과 지연과 인맥의 강고한 벽 앞에서 주저앉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태도 때문인지 공자는 30세에 예를 아는 것으로 이름을 날려 제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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