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그림으로 읽는 공자]노자를 찾아가 예를 묻다-문례노담

바람아님 2014. 3. 11. 19:44
▲ 작자 미상, ‘문례노담’ 1742년, 종이에 연한 색, 33×54㎝, 성균관대학교박물관

    공자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다. 노자(老子)를 찾아간 것도 그런 자세 때문이었다. 공자는 34세 때 노자를 찾아가서 예(禮)에 대해 물었다. 제자인 남궁경숙(南宮敬叔)과 함께였다. 남궁경숙은 대부 맹희자(孟僖子)의 유언을 받든 맹의자(孟懿子)와 더불어 공자에게 가서 예를 배운 제자다. 남궁경숙은 노나라 군주를 찾아가 “공자와 함께 주(周)나라에 가겠다”고 청했다.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 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갖추어 주고 주나라에 가서 예를 물어보게 했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간 것은 노자가 한때 주하사(柱下史·주나라 때 장서실을 맡아보던 관리)였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이상국가의 모델로 생각했던 공자는 노자가 주나라의 예절과 법도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를 물었다는 일화는 ‘사기열전’ ‘사기세가’ ‘공자가어’ 등에 언급되어 있다. ‘문례노담(問禮老聃)’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판본의 ‘공자성적도’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만큼 공자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된 ‘공자성적도’는 1742년에 제작된 작품인데 역시 그 안에도 ‘문례노담’이 담겨 있다.
   
   그림 속 왼쪽 난간 아래 공자 일행이 타고 온 수레가 있다. 수레를 끌고 온 동물은 기록과는 달리 말 두 마리가 아니라 소 한 마리다. 공자가 탄 수레는 항상 소가 끄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말이 모는 모습은 한 점도 그려지지 않는다. ‘공자성적도’의 여러 장면에는 공자를 만나러 온 사람 곁에 말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공자는 한 번도 말을 끌어본 적이 없다. ‘수레를 끌던 말 가운데 한 필을 보내 장례 비용에 보태도록 했다’는 ‘탈참관인(脫驂館人)’을 그릴 때도 말 대신 소가 등장한다. 소는 노자에 어울리는 동물이다. 노자가 청우(靑牛)를 타고 함곡관(函谷關)을 지나갔다는 내용 때문에 노자는 항상 청우를 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공자와 관련된 어떤 자료에도 공자가 말 대신 소를 선호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데 항상 공자 곁에 우차(牛車)가 그려진 것을 보면 ‘공자성적도’의 제작자가 공자의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를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우차를 선택한 것 같다.
   
    노자는 병풍을 배경으로 탁자 위에 앉아 있고, 공자와 남궁경숙은 그 앞에 앉아 노자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노자는 머리카락이 빠져 머리 윗부분이 훤한 것이 마치 사람의 수명을 주관한다는 수성노인(壽星老人) 같다. 도교의 교주인 노자가 도를 닦아 양생법(養生法)을 터득해 160세 혹은 200여세를 살았다는 기록을 떠올리면 그림 그린 사람이 수성노인을 염두에 두고 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공자가 평상복을 입고 있는 것에 반해 남궁경숙은 관모를 쓰고 있다. 남궁경숙이 관리의 신분으로 두 사람이 노나라 군주의 후원으로 이곳에 왔음을 알 수 있다. 다른 그림에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에서도 공자는 다른 사람에 비해 신체가 크다. 성인(聖人)과 보통 사람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공자와 남궁경숙은 양 손을 모은 채 앉아 있다. 노자 곁에 선 시종(혹은 제자)과 공자 뒤에 있는 시종(혹은 제자)도 모두 양손을 모으고 서 있다. 양손을 모으는 자세는 공손함의 표현이다. 노자가 연장자이거나 가르침을 주는 어른이라는 뜻이다. 공자 뒤에 서 있는 시종들도 기록과는 달리 한 명이 아니라 네 명이다. 그들을 시종이 아니라 제자라고 추정한 이유다.
   
   가르침을 준 노자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병풍에서 확인된다. 중국에서 병풍은 단순한 가리개가 아니다. 권위의 상징이고 정치성의 표현이다. 병풍이 세워지면 그곳은 ‘하나의 불특정한 공간이 두 개의 이웃하는 영역으로 나눠져’ 일시적이나마 ‘특정한 공간’으로 제한된다. 특정 인물 뒤의 병풍은 그 인물이 이 장소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황제 뒤에 대형 병풍을 세워 놓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황제가 병풍을 배경으로 앉아 병풍 밖의 인물을 바라볼 때 지배자와 지배받는 자의 위계관계는 분명해진다. 병풍은 병풍 앞에 앉은 사람의 권위와 우월성을 과시하는 틀이다. ‘문례노담’에서는 노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다.
   
   드디어 공자가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물었다.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말하는 성현들은 이미 뼈가 다 썩어지고 오직 그 말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또 군자는 때를 만나면 관리가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다북쑥처럼 떠돌이 신세가 되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나는 들었소. 그대의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이러한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소.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단지 이것뿐이오.”
   
   가르침을 청하는 손님에게 주인의 독설이 너무 과하다. 이처럼 공자와 노자는 가는 길이 다르다. 색깔이 다르고 지향점이 다르다. 두 사람의 세계관은 예(禮)와 인(仁) 등 몇 가지 근본 개념에서 차이점이 분명하다. 공자에게 예는 인간관계의 알파요 오메가다. 공자는 예를 ‘끊임없이 실천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인성을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한 데 반해, 노자는 예를 거추장스러운 허례와 허식으로 생각했다. 노자는 사람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예 대신 도(道)를 주장했다. 노자의 도는 정해진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통해 ‘굳이’ 표현해야 하니까 ‘도’라 이름 지었을 뿐 ‘도가 말할 수 있으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가족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근본으로 인(仁)을 중요하게 여겼다. 노자는 인을 차별과 치우침으로 보고 ‘하늘과 땅이 불인(不仁)’하기 때문에 사사로움이 없다고 여겼다. 노자는 자연에 합치된 도가 아닌 인위적인 도를 철저히 배격했다. 이런 독설을 듣고 난 공자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는 돌아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는 잘 난다는 것을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마치 용과 같은 존재였다.”
   
   사마천은 당시에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멀리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고 기록하면서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과연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라고 혀를 끌끌 찼다. 사마천의 탄식은 적어도 공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공자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지 알 수 없는’ 노자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그런데도 관점이 다른 노자의 견해를 수용하는 공자의 포용력이 대단하다.
   
   두 성인의 만남은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노자라는 인물 자체가 워낙 알려진 것이 없고 신비스러워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노자가 공자보다 연장자일 것이라는 가정은 대체로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항이다. ‘문례노담’을 제작한 유가에서는 마치 두 성인의 만남이 당연한 사실이었다는 듯 한자리에 앉혀 놓았다. 도교의 교주와 유가의 시조가 만났다. 거물의 만남에 천지의 축복이 빠질 수 없다. 하늘에 상서로운 구름이 자욱하게 뒤덮고 있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