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그림으로 읽는 공자]상갓집 개, 만세의 사표가 되다

바람아님 2014. 3. 6. 08:19
▲ 작자 미상, ‘공자사구상’, 106×66㎝,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공자가 정나라로 가던 길이었다. 어찌하다 보니 제자들과 떨어져 혼자 남게 되었다. 그는 홀로 동쪽 성문 밖에 서서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자공(제자)에게 말했다.
   
   “동문 밖에 한 사람이 서 있는데 키는 아홉 자 여섯 치나 되고 하수(河水)와 같이 길게 찢어진 눈에 이마는 높고 넓었으며, 그 머리는 요(堯)임금 같고, 목은 고요(皐陶) 같았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같았습니다. 허리 아래는 우(禹)임금보다 세 치가 짧았는데 풀이 죽어 기가 꺾인 모습이 마치 상갓집 개와 같더군요.”
   
   자공이 이를 공자에게 고하자 공자는 흔연히 감탄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가 그린 내 모습이 꼭 맞다고는 할 수 없으나 상갓집 개와 같다고 한 것은 맞다! 맞아!”
   
   주유열국(周遊列國)하고 있는 공자의 딱한 처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기원전 492년. 공자의 나이 60 때 일이었다.
   
   
   비천한 집안에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다
   
   공자(孔子)는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한(漢)나라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서 공자가 기원전 551년 9월에 출생하여 기원전 479년 4월에 죽었다고 적었다. 춘추(春秋)시대 사람이다.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 귀족이었지만 공자의 아버지대에 이르러서는 낮은 무사 계급으로 전락했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부인 안징재와 혼인할 때 그의 나이가 66세였다. 스무 살이 되지 않은 안씨 부인과 50세 가까이 나이 차가 났다. 그래서 사마천은 두 사람의 결혼을 ‘야합(野合)’이라 애매하게 표현했다. 정식 혼인을 하지 않고 남녀가 결합했다는 뜻이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많은 것은 안징재가 숙량흘의 세 번째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숙량흘은 첫 번째 부인과 혼인하여 딸만 아홉을 낳았다. 첩을 들여 아들을 얻었는데 다리가 불구였다. 공자의 어머니를 만나고서야 원하는 아들을 얻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공자가 세 살 때 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를 데리고 추읍을 떠나 노나라의 도읍인 곡부(曲阜) 성 안의 궐리(闕里)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공자는 본가와 인연이 끊어진 듯하다. 공자가 17세 때 어머니가 사망했는데 어머니를 부친의 묘에 합장하고자 했으나 그 위치를 알지 못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모친이 사망한 후 공자는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훗날 공자가 ‘내가 어렸을 때는 집안이 가난하여 생계를 위해 험한 일을 했었다’고 회상한 것만 봐도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출신성분으로 따진다면 공자는 결코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없을 정도로 핸디캡이 많은 사람이다.
   
   공자는 19세에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다. 50세를 전후해 큰 벼슬을 하기까지 행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창고의 출납을 관장하거나 가축을 관리하는 낮은 벼슬을 했을 뿐이다. ‘논어’에는 공자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간략하게 정리한 문장이 전한다.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 살에 스스로 섰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의혹되지 않았다. 쉰 살에는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는 귀에 들어오는 소리에 마음이 거슬리지 않았고, 일흔 살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자는 51세부터 55세까지 대략 4년 동안 중도재(中都宰)를 거쳐 대사구(大司寇·경찰청장)를 지냈다. 머리에 관을 쓴 모습의 공자 초상화는 대사구 시절 모습이다. 대사구 시절은 짧았다. 그는 노나라에서 더 이상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없는 것을 알고 긴 유랑길에 올랐다. 유랑은 14년 동안이나 계속됐지만 그를 환영하는 군주는 만나지 못했다. 68세가 되어 고국인 노나라로 되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일체의 정치적 활동은 접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고문헌을 정리하는 데 전념하다 73세를 일기로 긴 일생을 마쳤다.
   
   
   존공도 비공도 아닌 인간 공자
   
   공자는 비천한 집안에서 어렵게 살았다.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받아줄 사람을 찾아다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공자는 ‘안 될 줄 알면서도 행하는 자’라고 평가받은 것처럼 생전에는 현세적인 성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그가 역사 속에서 만세의 사표가 되고 성인(聖人)으로 추대됐다. 공자가 유가(儒家)의 스승을 넘어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필요성이 개입됐기 때문이다.
   
   공자를 가장 먼저 성역화의 대상으로 점찍은 건 한(漢·기원전 206~기원후 220)왕조였다. 유방이 세운 한왕조는 통치를 위해 유학이 필요했다. 한에 앞선 중국의 첫 통일왕조 진의 시황은 강력한 법치(법가사상)를 정치이념으로 했으나 가혹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의 지도자는 새 나라의 정치이념으로 사람들의 성정을 근본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인성교육을 찾았다. 이때 주목받은 것이 공자였다.
   
   한 무제(武帝) 때 학자 동중서(董仲舒·기원전 198~106)에 의해 공자는 ‘소왕(素王)’으로 격상됐다. 전한(前漢) 마지막 황제 평제(平帝·기원후 1~5)는 공자에게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제후 반열에 올려놓았다. 당 현종(玄宗·960~1279)은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왕의 시호를 내렸고, 송 진종(眞宗·998~1012)은 현성문선왕(玄聖文宣王)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이로써 작은 나라의 평범한 스승 공자는 ‘왕위는 없지만 임금으로서의 덕을 갖춘 소왕’으로 눈부시게 부활했다.
   
   모든 시대에 공자가 한결같이 존경받은 것은 아니다. 공자는 권력자들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때로는 존공(尊公)이 되기도 하고 비공(批孔)이 되기도 하는 등 극단적 평가를 받았다. ‘존공’은 한(漢)대부터 시작되어 청(淸)대까지 봉건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틀이 됐다. ‘비공’은 태평천국(太平天國·1851~1864)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洪秀全·1898~1976)이 신도들을 모으는 방편으로 이용됐다.
   
   근대에 와서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 장칭(江靑)을 위시한 사인방(四人幇)이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축출하기 위해 ‘비공’을 선택했다. 현재 중국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이 마르크시즘을 대체할 이념으로 인식되어 새롭게 공자 열풍이 일고 있다. 열풍이 아니라 거의 광풍에 가깝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우리가 공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이런 정치적 계산 때문이 아니다. 그럼 지금 이 시점에서 왜 다시 공자인가. 이 물음에서 이번 연재가 시작됐다.
   
   
   공자의 일생을 그린 ‘공자성적도’
   
   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를 들여다봐야 한다. 아무리 매끈한 언어로 많은 사람을 현혹해도 말하는 사람의 생애가 명료하지 않으면 말짱 다 거짓이다. 사람의 생각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돼 있다.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 구호는 공허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는 스스로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실천한 사람이다. 공자의 생애를 들여다볼 수 있는 문헌자료는 의외로 많이 남아 있다. ‘대학’ ‘중용’ ‘맹자’ ‘논어’를 비롯해 ‘공자가어’ ‘순자’ ‘장자’ 등 동양 고전이라 일컫는 책에는 모두 공자의 자취가 짙게 묻어 있다.
   
   이번 연재는 기존의 접근법과 시각을 조금 달리하여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를 중심으로 공자를 살펴볼 예정이다. ‘공자성적도’는 공자의 일생에서 기념할 만한 사건이나 이야기를 그림을 곁들여 도해한 일종의 ‘공자평생도(孔子平生圖)’다. 적게는 10편에서 많게는 100편이 넘는 그림으로 이뤄져 있어 시각적으로 공자의 생애와 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번 연재는 ‘공자평생도’가 중심이 되겠지만 이밖에도 중국의 고개지(顧愷之·345~406년경), 염립본(閻立本·601~673), 오도자(吳道子·700?~760?), 구영(仇英·약1509~1551)의 작품을 비롯해 조선에서 간행된 여러 판본의 판화집과 필사본을 아울러 참고할 계획이다. 긴 연재를 통해 공자가 훈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준 스승이었음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독자님들의 많은 격려와 질책을 부탁드린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 대학원, 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침없는 그리움’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우리나라 대표 그림’ ‘그림공부, 사람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