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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262] 무기력 사회

바람아님 2014. 4. 22. 21:51

(출처-조선일보 2014.04.22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마음이 우울하여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책 속에 길이 있으려니 하여 한병철의 '피로사회'와 
박경숙의 '문제는 무기력이다'를 다시 읽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우리 시대를 긍정성의 과잉에 기댄 '성과사회'이자 
우울증이 다스리는 '피로사회'로 규정한다. 
소련의 붕괴로 어쭙잖은 승리감에 도취된 자본주의 사회가 어느덧 우리 모두를 노동만 하는 동물로 
만들었건만 결코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피로의 폭력화라고 갈파한다. 
이런 피로 과잉의 시대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그는 무작정 활동적인 삶에서 벗어나 '깊은 심심함'과 
'돌이켜 생각함'을 통한 사색적 삶의 부활을 제안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은 심심함의 사고(思考)를 허용하지 않는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사고(事故) 때문에 개인의 일상적 피로는 물론 사회 전체가 만성적 피로에 시달린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은 여기에 한 가지 심각한 우려를 더한다. 최소한의 책무조차 내팽개친 채 
자기부터 챙기고 보는 극도의 
이기주의, 위기 상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일부 정부 부처의 총체적 무능력, 첨단 기술을 가졌다더니 기껏 시속 12㎞의 물살
 때문에 선체에 제대로 접근조차 못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무기력함….

그렇다, 문제는 무기력이다. 
인지과학자 박경숙에 따르면 무기력은 산에서 길을 잃어 헤매는 과정이 아니라 사막에서 나침반을 잃어버리는 경우란다. 
산에서는 길을 잃더라도 계속 낮은 곳을 향해 하산하면 살아남을 수 있지만 사방이 똑같은 사막에서 나침반을 잃으면 
속절없는 방황만 계속할 수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여전히 만연해 있는 후진적 관행, 대형 사고 때마다 여실히 드러나는 위기관리 체계의 부재,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매달렸건만 속수무책으로 좌절당하는 무력함에 혹여 우리 사회 전체가 무의식적 무기력 상태에 빠져드는 건 
아닐까 두렵다. 그렇다고 이미 거쳐온 '규율사회'로 되돌아가서는 안 되지만, 이참에 우리의 삶을 근본부터 다시 돌아봤으면 
한다. 페터 한트케가 말하는 '눈 밝은 피로'가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