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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276] 후두염

바람아님 2014. 7. 29. 09:11

(출처-조선일보 2014.07.29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1990년대 초반 박사 학위를 받고 이 대학 저 대학 인터뷰하러 다니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대학은 어느 날 하루 지원자들을 불러 세미나를 하게 하고 교수들이 질문 몇 개 한 다음 덜컥 
신임 교수를 뽑지만, 미국에서는 지원자가 2~3일간이나 머물며 세미나도 하고 교수들과 밥도 여러 
차례 먹고 때론 대학원생들 파티에도 불려간다. 따지고 보면 배우자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낼 
사이인 만큼 실력은 물론 다양한 상황에서 인품도 꼼꼼히 살피기 위함이다.

1991년 겨울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 칼리지(Reed College)에 갔을 때 일이다. 
캠퍼스 근처에 있는 민박형 숙박 시설에 묵었다. 둘째 날 아침 식당으로 내려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주인 아주머니에게 밝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나는 분명히 입을 벌리고 "굿 모닝, 캐런"이라 
말했건만 내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인사말을 했건만 이게 
웬일인가? 그저 약간 쇳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밤새 급성 후두염에 걸린 것이었다. 그날 오후에 나는 세미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짐작하겠지만 물론 나는 그 대학 교수가 되지 못했다.

후두는 인두 바로 아래에 있으며 코와 입으로 들어온 공기에 습기를 제공하고 이물질을 걸러내는 역할을 하는 호흡기관이다. 
후두에 염증이 생겨 부으면 호흡이 어려워져 자칫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또한 후두는 성대를 싸고 있어 후두염에 걸리면 
쉰 목소리가 나거나 심하면 아예 소리를 낼 수 없게 된다. 
이달 내내 일도 많고 해외 출장도 잦아서 그랬는지 거의 20년 만에 다시 후두염에 걸렸다. 통증과 기침은 그리 심하지 않지만 
목소리를 잃어 어렵게 잡았던 강연 일정이 줄줄이 무너지고 말았다. 목소리를 잃더라도 글로 쓰거나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는 있지만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성대의 연골과 근육을 둘러싸고 있는 얇은 점액질 막의 떨림이 이처럼 대단하게 
내 삶을 좌지우지하다니. 그리고 그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의 농간 때문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