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사진칼럼

[인문의 향연] 삶이 작은 膳物(선물)이라면

바람아님 2014. 11. 5. 09:04

(출처-조선일보 2014.11.05 신수진 사진심리학자)


신수진 사진심리학자볼 때마다 感興 다른 '골목 안 풍경'
사진가가 천착했던 골목 사라졌지만
變化 있어 과거·미래가 의미 갖는 것

누구나 아는 가르침대로 활기차고 감사하게 오늘을 살아야겠지만 때때로 몸은 무겁고 삶은 버겁다. 
유난히 부고(訃告)도 많이 전해지는 것 같고, 나도 모르게 살아온 날과 남은 날을 가늠해 보면서 
어느새 세월의 덧없음을 느낀다. 그 와중에도 단풍은 참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그렇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가을을 타나 보다. 
계절 탓이든 무엇이든 하루하루를 선물이라고 느끼며 살아가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행복과 감사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이유 없이 헛헛한 마음이 드는 조용한 아침이면 나는 잠깐씩 사진 들여다보기를 즐긴다. 
직업이 매일 사진을 보는 일이지만 시간이나 과제에 쫓기지 않고 책장에 꽂혀 있는 사진집을 꺼내서 무심히 넘기다 보면 
찍은 사람과 찍힌 세상에 대한 온갖 상상으로 천천히 가슴에 온기가 도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미 알고 있는 작가들 사진이라도 매번 다른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나의 마음이 늘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김기찬, 골목 안 풍경, 서울 도화동, 1989.김기찬, 골목 안 풍경, 서울 도화동, 1989.

김기찬(1938~2005)의 '골목 안 풍경'은 어쩌다 한번을 들여다보아도 
항상 다른 감흥을 찾게 해주는 선물 같은 책이다. 
오늘 내 눈을 사로잡은 사진 속에선 아이가 길을 걷는다. 
부슬부슬 내리다 땅을 흥건히 적신 듯한 빗속을 걷는다. 
집을 나서서 친구 집으로 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컷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작은 손을 머리에 얹어 비를 가리고 타박타박 발걸음을 옮긴다. 
아이의 작은 키만큼, 딱 그만한 그림자가 발끝에 달려 있다. 
비는 내려도 해는 떠 있구나. 
아이가 향하는 곳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진 않지만 빛이 있는 곳이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찬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도 가야 할 길이 있고 
다가갈 빛이 있으니 누군가의 삶의 한 순간이라는 게 
참으로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1960년대 말부터 30년 넘게 서울의 공덕동·행촌동·중림동 등지에서 골목 풍경을 촬영했던 사진가 김기찬은 
자신의 작업을 되돌아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 
"골목 안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고, 어른들은 노인이 되었다. 
재개발 사업으로 그곳에 살던 골목 안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다. 
골목은 내 평생의 테마라고 했는데 내 평생보다 골목이 먼저 끝났으니 이제 '골목 안 풍경'도 끝내지 않을 수 없다.
변화란 아무리 대비해도 낯선 만큼 갑작스럽게 다가오고야 만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풍경이 되고 나니 사진 속에 남은 모습이 날이 갈수록 더 특별하게 보이듯이, 
변화가 있어서 과거도 미래도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형편없다. 
하버드의 심리학자 댄 길버트는 우리가 미래에 다가올 시간의 힘을 저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고 지적하면서, 
시간에 관해서 오직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역설하였다. 
인간은 변화 가능성을 너무 낮게 평가하고 반대로 현재 상태가 지속될 가능성을 과대평가한다. 
이러한 성향이 추정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불안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에 충실한 자에게 시간과 그에 따른 변화는 언제나 세상을 새롭게 경험할 기회로 이어진다. 
평범한 골목 풍경이 특별한 삶의 순간으로 읽힐 수 있듯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의 선물처럼 다가올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아이가 아니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앞에서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될지 모르는 존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