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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290] 기무라 모토(木村資生)

바람아님 2014. 11. 11. 09:24

(출처-조선일보 2014.11.11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지금은 골동품 가게 혹은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우리는 '투시 환등기(overhead projector)'라는 기기를 사용하여 강의를 하곤 했다. 
컴퓨터 화면을 곧바로 스크린에 투영하는 기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미리 준비한 투시물 교재를 
환등기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판서까지 할 수 있어서 매우 유용했다. 
그 당시 국제학회에 가면 이 투시용 환등기에 수학 공식을 빼곡히 적으며 논문 발표를 하는 
일본 학자들을 볼 수 있었다. 영어 발음은 알아들을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쟁쟁한 서양 학자들이 
숨을 죽인 채 경청하는 모습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이런 진풍경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 기무라 모토다. 
11월 13일은 그가 태어나고 죽은 날이다. 1924년에 태어나 1994년 70세 생일에 작고하기까지 
그는 세상 모든 진화생물학자가 다윈의 자연선택 메커니즘에만 코를 박고 있을 때 분자 수준의 진화적 변이는 딱히 이롭거나 
해롭지 않고 대체로 중립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의 중립 이론에 따르면 진화는 잘 짜인 필연 관계보다는 주로 우연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논리를 수학 공식을 사용해 정립했다. 수학적 소양이 빈약한 서양 생물학자들을 단숨에 
제압한 것이다. 그가 열어젖힌 이론생물학의 길을 따라 그 후 많은 일본 학자들이 줄줄이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서울대 생물학과 교수 시절 나는 수학과에 특강을 자청한 적이 있다. 수학이라면 우리도 일본에 뒤지지 않건만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수학생물학자가 없는 현실을 지적하며 전향을 호소했다. 지난 8월 세계수학자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렸다. 
나는 조만간 수학 분야의 노벨상이라는 필즈 메달(Fields medal) 수상자가 우리나라에서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순수 수학만 홀로 영광받지 말고 내친김에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우리나라 수학의 위용이 넘쳐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