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지만 공룡은 죽어서 뼈를 남긴다. 반듯한 뼈가 아니어도 좋다. 공룡이 지나간 발자국 흔적도 지구의 과거를 여행하는 타임머신이다. 지난달 말 국내 고생물학계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경남 하동군 금성면 가덕리에서 국내 최초의 육식공룡 화석이 확인됐다. 몸길이가 50㎝가 안 되는 초소형이지만 공룡의 전체 골격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1억1000만 년 전 한반도의 풍경이 되살아났다.
발굴 현장을 지킨 국립문화재연구소 임종덕(46) 학예연구관은 지금도 흥분된 표정이다. 한국 토종 공룡의 복원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다. 1999년 미국 캔자스대에서 척추고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불모지 같았던 국내 공룡 연구를 개척한 1등 공신으로 꼽힌다. 어린이 공룡책 등 관련 서적도 15종 가까이 내며 공룡의 대중화에 매진해 왔다.
- 이번 발견이 왜 중요한가.
“‘아기공룡 둘리’나 ‘점박이’ 등을 보자. 학술적 근거가 부족한 상태로 만든 캐릭터다. 발자국이나 뼈 일부로 모양새를 추정했다. 엄격히 말해 우리나라 공룡이 아니다. 외국 공룡의 얼굴을 얹어놓은 꼴이다. 지금까지 머리뼈 화석이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표현이 그렇지만 ‘깨끗하게 잘 죽어주어서’ 이번에 토종 공룡의 실체를 알 수 있게 됐다.”
- 공룡에도 국경이 있나.
“민족주의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공룡은 무궁무진한 문화콘텐트다. 완구·게임·애니메이션 등 부가가치가 대단하다. 축구를 예로 들면 호날두나 메시를 부러워하다가 손흥민을 보면 흐뭇하지 않나. 공룡 쪽에서도 국가대표 콘텐트를 만들 수 있게 돼 즐겁다.”
- 이번 공룡은 왜소한 것 같은데.
“우리가 공룡에 매혹되는 건 엄청난 크기 때문이다. 세계의 자연사박물관 중앙홀도 공룡들 차지다. 작은 공룡은 희귀하다. 그래서 더 소중하다. 공룡 연구의 패러다임이 바뀔 수 있다. 이번 화석을 뜯어보면 두 마리가 얽혀 있는 것 같다. 연령대가 비슷하다. 집단생활을 했는지, 형제인지 자매인지, 무엇을 먹었는지 등 밝혀낼 대목이 많다.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다. 절로 국가 홍보가 된다.”
- 뭔가 ‘귀인’을 만났나 보다.
“외국 공룡책을 보라. 대부분 유럽·미국 공룡만 등장한다. 국제공인을 받은 우리만의 온전한 공룡이 없기 때문이다. 캔자스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다 2002년 한국에 돌아오고,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BK21 교수를 하다가 2006년 문화재연구소에 자원한 것도 모두 국격을 높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 생각보다 굴절이 많았다.
“학부는 성균관대 생명과학과를 나왔다. 해양생물을 전공하려고 했다. 유학 준비도 마친 상태였다. 대학 3학년 겨울방학 때인 1990년 1월 영국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공룡뼈를 처음 보았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모든 게 정지한 느낌이었다. 그때만 해도 공룡을 상상의 동물로만 생각했다. 그만큼 배운 게 없었고, 들은 게 없었다. 인생 항로가 확 바뀌었다.”
- 미국의 연구조건이 더 나을 텐데.
“회의가 들었다. 열심히 발굴하고 논문도 썼지만 결국 미국 공룡 얘기였다. 우리 것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 없었다. 제 지식과 노하우를 전하고, 후학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기를 바랐다. 한국에 돌아간다고 하니 모두 의아해했다.”
- 공무원(5급)이 된 걸 후회하지 않나.
“절대 그렇지 않다. 학교에 남았다면 형편이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학생을 가르치고, 논문을 쓰고, 미래가 빤히 그려진다. 연구도 연구지만 문화재 보존·활용에도 관심이 크다. 언제든 화석 현장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다. 문화재청에서 박사학위를 지닌 자연유산 전문가를 공모해 바로 지원했다. 이 분야 1호가 됐다. 1년에 100일 정도 현장에 나간다.”
- 그간 쌓아온 성과를 든다면.
“우리나라는 전국이 지붕 없는 자연사박물관이다. 공룡의 낙원이었다. 특히 공룡 발자국 화석은 수효나 보존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외국 학자들도 발자국 화석을 연구하려면 한국에 와야 한다. 지금까지 보고된 화석 산지가 100여 곳이다. 5곳(경남 고성, 전남 해남·여수·화순·보성)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잠재 목록에 올라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익룡 발자국(길이 35.4㎝ 경북 군위), 세계에서 가장 작은 육식공룡 발자국(길이 1.27㎝ 경남 남해) 등을 국제학술지에 소개했다. 발견 당시의 희열은 산삼을 찾아낸 심마니 이상일 것이다. 보물찾기와 비슷하다.”
- 한국에 공룡뼈 화석은 왜 드문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에 한반도 지층이 화산 폭발 등으로 열 변성을 많이 받아 뼈가 녹거나 부서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연구층이 너무 얇다는 점도 들 수 있다. 저를 포함해 공룡 관련 학자가 5~6명 남짓이다. 중국만 해도 300명이 넘는다. 공룡뼈가 없는 게 아니라 이를 찾아낼 연구진이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연구 수준도 미국에 100년, 일본·중국에 30년 정도 뒤졌다. 그래도 분명한 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공룡 화석이 지금도 한반도 곳곳에 숨어 있다는 점이다. 더 완벽한 화석이 나올 것으로 확신한다.”
- 많은 후학을 기다리겠다.
“공룡 연구는 말 그대로 블루 오션이다. 지금 시작해도 정상급에 들 수 있다. 왜 사람들이 의학·법학·경영학 등에 몰리지는 모르겠다. 일례로 국내에는 과학 전문 일러스트레이터가 한 명도 없다. 의학·생물학 논문 작성에 필수적인 직종인데도 말이다.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야 한다. 아버지께서 대기업에 다니셨다. 매일 밤 늦게 귀가하셔서 얼굴을 뵙기가 힘들었다. 그때부터 ‘나만의 길을 가겠다. 창조적인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 공룡 공부는 돈이 많이 들지 않나.
“20세기 초 미국이 그랬다. 뉴욕의 부호들이 남보다 좋은 화석을 차지하려고 화석 사냥꾼들을 고용하며 자존심 경쟁을 벌였다. 요즘으로 치면 더 비싼 차를 소유하려는 과시욕과 비슷했다. 제 경우 유학 시절 한 달 100만원으로 세 식구가 생활했다.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해결했다. 마트에서도 가장 싼 것만 구입했다. 미국인이 먹지 않은 소 꼬리뼈를 사다가 1주일간 곰탕을 먹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뼈와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하하하.”
- 공룡학자의 자질 같은 게 있을까.
“머리가 좋을 필요가 없다. 끈기와 성실이 핵심이다. 그래야 관찰력이 생기고 남들이 못 본 걸 찾아낼 수 있다. 저를 지도했던 래리 마틴 교수는 화석을 경청하는 자세로 살폈다. 누워서 보고, 옆에서 보고, 엎드려서 보았다. 저명 공룡학자인 예일대 존 오스트롬 교수는 학생들에게 치킨 한 마리를 시켜주고 그 다음 날까지 뼈 표본을 만들어 오라고 요구했다. 실제로 발굴 현장에 가면 두 달 정도 샌드위치만 먹으며 버텨야 할 경우가 많다. 다이어트가 절로 된다.”
- 앞으로 할 일도 많겠다.
“국내에 10여 개 자연사박물관이 있는데 모두 규모가 작다. 2021년을 목표로 국립자연사박물관을 준비 중이다. 그 안에 들어갈 화석·암석 표본을 계속 수집하고 있다. 그 박물관 중앙홀에 우리나라 공룡이 들어가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국민이 향유하는 공간을 만드는 게 내 공직생활의 남은 꿈이다. 한국에 돌아온 뒤 동료들과 함께 소외계층 아동이나 발달장애아를 위한 ‘찾아가는 박물관 교실’도 100여 회 열어 왔는데, 이 일만큼은 퇴직 후에도 계속하고 싶다. 교육만이 답이다. 어린이책을 많이 낸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발굴 현장을 지킨 국립문화재연구소 임종덕(46) 학예연구관은 지금도 흥분된 표정이다. 한국 토종 공룡의 복원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다. 1999년 미국 캔자스대에서 척추고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불모지 같았던 국내 공룡 연구를 개척한 1등 공신으로 꼽힌다. 어린이 공룡책 등 관련 서적도 15종 가까이 내며 공룡의 대중화에 매진해 왔다.
공룡박사 임종덕씨가 서울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을 찾았다. 그의 뒤로 육식공룡 아크로칸토사우루스의 모형이 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이번 발견이 왜 중요한가.
“‘아기공룡 둘리’나 ‘점박이’ 등을 보자. 학술적 근거가 부족한 상태로 만든 캐릭터다. 발자국이나 뼈 일부로 모양새를 추정했다. 엄격히 말해 우리나라 공룡이 아니다. 외국 공룡의 얼굴을 얹어놓은 꼴이다. 지금까지 머리뼈 화석이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표현이 그렇지만 ‘깨끗하게 잘 죽어주어서’ 이번에 토종 공룡의 실체를 알 수 있게 됐다.”
- 공룡에도 국경이 있나.
“민족주의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공룡은 무궁무진한 문화콘텐트다. 완구·게임·애니메이션 등 부가가치가 대단하다. 축구를 예로 들면 호날두나 메시를 부러워하다가 손흥민을 보면 흐뭇하지 않나. 공룡 쪽에서도 국가대표 콘텐트를 만들 수 있게 돼 즐겁다.”
- 이번 공룡은 왜소한 것 같은데.
“우리가 공룡에 매혹되는 건 엄청난 크기 때문이다. 세계의 자연사박물관 중앙홀도 공룡들 차지다. 작은 공룡은 희귀하다. 그래서 더 소중하다. 공룡 연구의 패러다임이 바뀔 수 있다. 이번 화석을 뜯어보면 두 마리가 얽혀 있는 것 같다. 연령대가 비슷하다. 집단생활을 했는지, 형제인지 자매인지, 무엇을 먹었는지 등 밝혀낼 대목이 많다.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다. 절로 국가 홍보가 된다.”
- 뭔가 ‘귀인’을 만났나 보다.
“외국 공룡책을 보라. 대부분 유럽·미국 공룡만 등장한다. 국제공인을 받은 우리만의 온전한 공룡이 없기 때문이다. 캔자스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다 2002년 한국에 돌아오고,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BK21 교수를 하다가 2006년 문화재연구소에 자원한 것도 모두 국격을 높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경남 하동군 가덕리에서 최근 발굴된 육식공룡 골격 화석. 크기는 작지만 티라노사우루스처럼 두 발로 이동하며 날카로운 이빨을 지녔다. [사진 문화재청]
“학부는 성균관대 생명과학과를 나왔다. 해양생물을 전공하려고 했다. 유학 준비도 마친 상태였다. 대학 3학년 겨울방학 때인 1990년 1월 영국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공룡뼈를 처음 보았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모든 게 정지한 느낌이었다. 그때만 해도 공룡을 상상의 동물로만 생각했다. 그만큼 배운 게 없었고, 들은 게 없었다. 인생 항로가 확 바뀌었다.”
- 미국의 연구조건이 더 나을 텐데.
“회의가 들었다. 열심히 발굴하고 논문도 썼지만 결국 미국 공룡 얘기였다. 우리 것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 없었다. 제 지식과 노하우를 전하고, 후학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기를 바랐다. 한국에 돌아간다고 하니 모두 의아해했다.”
- 공무원(5급)이 된 걸 후회하지 않나.
“절대 그렇지 않다. 학교에 남았다면 형편이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학생을 가르치고, 논문을 쓰고, 미래가 빤히 그려진다. 연구도 연구지만 문화재 보존·활용에도 관심이 크다. 언제든 화석 현장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다. 문화재청에서 박사학위를 지닌 자연유산 전문가를 공모해 바로 지원했다. 이 분야 1호가 됐다. 1년에 100일 정도 현장에 나간다.”
- 그간 쌓아온 성과를 든다면.
“우리나라는 전국이 지붕 없는 자연사박물관이다. 공룡의 낙원이었다. 특히 공룡 발자국 화석은 수효나 보존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외국 학자들도 발자국 화석을 연구하려면 한국에 와야 한다. 지금까지 보고된 화석 산지가 100여 곳이다. 5곳(경남 고성, 전남 해남·여수·화순·보성)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잠재 목록에 올라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익룡 발자국(길이 35.4㎝ 경북 군위), 세계에서 가장 작은 육식공룡 발자국(길이 1.27㎝ 경남 남해) 등을 국제학술지에 소개했다. 발견 당시의 희열은 산삼을 찾아낸 심마니 이상일 것이다. 보물찾기와 비슷하다.”
- 한국에 공룡뼈 화석은 왜 드문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에 한반도 지층이 화산 폭발 등으로 열 변성을 많이 받아 뼈가 녹거나 부서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연구층이 너무 얇다는 점도 들 수 있다. 저를 포함해 공룡 관련 학자가 5~6명 남짓이다. 중국만 해도 300명이 넘는다. 공룡뼈가 없는 게 아니라 이를 찾아낼 연구진이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연구 수준도 미국에 100년, 일본·중국에 30년 정도 뒤졌다. 그래도 분명한 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공룡 화석이 지금도 한반도 곳곳에 숨어 있다는 점이다. 더 완벽한 화석이 나올 것으로 확신한다.”
- 많은 후학을 기다리겠다.
“공룡 연구는 말 그대로 블루 오션이다. 지금 시작해도 정상급에 들 수 있다. 왜 사람들이 의학·법학·경영학 등에 몰리지는 모르겠다. 일례로 국내에는 과학 전문 일러스트레이터가 한 명도 없다. 의학·생물학 논문 작성에 필수적인 직종인데도 말이다.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야 한다. 아버지께서 대기업에 다니셨다. 매일 밤 늦게 귀가하셔서 얼굴을 뵙기가 힘들었다. 그때부터 ‘나만의 길을 가겠다. 창조적인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 공룡 공부는 돈이 많이 들지 않나.
“20세기 초 미국이 그랬다. 뉴욕의 부호들이 남보다 좋은 화석을 차지하려고 화석 사냥꾼들을 고용하며 자존심 경쟁을 벌였다. 요즘으로 치면 더 비싼 차를 소유하려는 과시욕과 비슷했다. 제 경우 유학 시절 한 달 100만원으로 세 식구가 생활했다.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해결했다. 마트에서도 가장 싼 것만 구입했다. 미국인이 먹지 않은 소 꼬리뼈를 사다가 1주일간 곰탕을 먹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뼈와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하하하.”
- 공룡학자의 자질 같은 게 있을까.
“머리가 좋을 필요가 없다. 끈기와 성실이 핵심이다. 그래야 관찰력이 생기고 남들이 못 본 걸 찾아낼 수 있다. 저를 지도했던 래리 마틴 교수는 화석을 경청하는 자세로 살폈다. 누워서 보고, 옆에서 보고, 엎드려서 보았다. 저명 공룡학자인 예일대 존 오스트롬 교수는 학생들에게 치킨 한 마리를 시켜주고 그 다음 날까지 뼈 표본을 만들어 오라고 요구했다. 실제로 발굴 현장에 가면 두 달 정도 샌드위치만 먹으며 버텨야 할 경우가 많다. 다이어트가 절로 된다.”
- 앞으로 할 일도 많겠다.
“국내에 10여 개 자연사박물관이 있는데 모두 규모가 작다. 2021년을 목표로 국립자연사박물관을 준비 중이다. 그 안에 들어갈 화석·암석 표본을 계속 수집하고 있다. 그 박물관 중앙홀에 우리나라 공룡이 들어가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국민이 향유하는 공간을 만드는 게 내 공직생활의 남은 꿈이다. 한국에 돌아온 뒤 동료들과 함께 소외계층 아동이나 발달장애아를 위한 ‘찾아가는 박물관 교실’도 100여 회 열어 왔는데, 이 일만큼은 퇴직 후에도 계속하고 싶다. 교육만이 답이다. 어린이책을 많이 낸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