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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고아원에 사유재산제, 아이들이 달라졌다…충주 아동복지시설 ‘진여원’ 혜원 스님

바람아님 2015. 1. 2. 11:27

(출처-주간조선 2015.01.01 황은순 기자)


충북 충주시가 인가한 아동복지시설은 사회복지법인 성불복지회가 운영하는 ‘진여원’(원장 혜원 스님·50)이 유일하다. 
김유진(가명·23)씨가 진여원에 들어온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한 시설에 있다가 적응을 못해 진여원까지 오게 됐다. 다행히 김씨는 진여원에서 잘 지냈다. 
아동복지시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만 18세가 됐을 때 대학 진학을 못할 경우 퇴소를 해야 한다. 
김씨도 고교 졸업 후 홀로서기를 고민해야 했다. 공장에 취업하려는 김씨에게 원장인 혜원 스님은 대학진학을 권했다. 
충주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유치원에 취업한 김씨는 진여원을 나와 독립했다.
충주 아동복지시설 '진여원' 혜원 스님. /사진=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충주 아동복지시설 '진여원' 혜원 스님. /사진=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김씨는 첫 보금자리로 충주시에 있는 작은 원룸 전셋집을 얻었다. 
김씨에게는 진여원에서 생활하면서부터 모은 2000만원이 든 통장이 있었다. 
김씨가 2000만원을 모은 것은 진여원이 2004년부터 시작한 ‘사유재산제’ 덕분이다. 
진여원은 모든 원생에게 후원자와 1 대 1로 연결된 결연통장을 만들어 주었다. 
대부분 시설이 후원금을 받아 시설 운영에 사용하는 것과는 다르게 진여원은 원생에게 개인 계좌를 만들어주고 
후원자를 연결해 주었다. 진여원 소유의 텃밭을 원하는 원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짓게 하는 ‘개인 농장’ 프로젝트도 
시도했다. 각자 수확한 농작물을 진여원에서 구매해 주고 수익금을 개인 통장에 넣어주려고 했는데 오래가진 못했다. 
뜻은 좋았지만 학교 가고 학원 다니기 바쁜 아이들이 일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회보 발송, 김장 도우미, 풀 뽑기 등 
아르바이트 거리를 만들어 줬다. 아르바이트는 신청자가 몰려 선착순으로 끊어야 할 만큼 인기가 있었다. 
통장에 돈이 불어나는 재미를 알게 된 원생들은 후원금은 물론이고 개인 용돈이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통장에 넣기 
시작했다.

개인 통장이 경제관념을 만들어주면서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돈이 생기면 밖으로 나돌며 딴짓하기 바쁘던 아이들이 돈 쓰는 것이 아까워 바깥 출입을 줄였다. 
시설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히 공부나 취미생활에 눈을 돌리게 됐다. 
문제아들이 줄어들고 대학 진학률도 50%에 이를 만큼 늘었다.

지난 12월 8일 충주호를 끼고 진여원으로 가는 길은 드라이브 명소로 꼽힐 만큼 아름다웠다. 
남학생 26명, 여학생 10명 등 원생 38명이 생활하는 2층 건물이 양지 바른 곳에 있었다. 1층에는 남학생 숙소와 식당이, 
2층에는 여학생 숙소와 200여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강당이 있었다. 강당에는 대형 북, 피아노, 드럼 등 온갖 악기가 
갖춰져 있고 공연을 할 수 있는 작은 무대도 있었다. 
2층 여학생 방 앞에는 ‘미녀들의 방’ ‘달콤한 방’ 등 아이들이 만든 팻말이 붙어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비어있는 
진여원을 지키고 있던 혜원 스님이 드립커피를 내려주었다. 혜원 스님은 1995년 조립식 건물에서 미인가 시설로 시작해 
노인·장애인·아동들이 섞여 있던 진여원을 2002년부터 맡아 아동복지시설로 만들었다.

“처음 와보니 아이들 20명 중 5명이 보호관찰대상이고, 1명은 소년원에 가 있고 다른 아이들도 아주 거칠었어요. 
걸핏하면 학교 빠지고 가출한 아이들 데려오느라 파출소를 내 집처럼 드나들었어요. 날마다 전쟁이었죠.”

마음의 상처가 큰 만큼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아이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은 거칠었다. 현재 진여원의 아이들은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워졌다.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레슬링 선수도 있고 태권도·피아노 대회에서 대상을 
받아오는 아이들도 있다. 경기도 민요대회 1등도 나왔다.

무엇이 아이들을 달라지게 만들었을까. 혜원 스님이 진여원을 맡고 전국 아동복지시설 중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 
‘사유재산제’였다. 아이들이 시설을 퇴소하고 사회로 나갈 때 어떻게 하면 자립 기반을 마련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나온 아이디어였다. “뭐 거창하게 사유재산제라고 하기는 그렇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퇴소할 때 방 보증금이라도 마련해 
주자는 생각으로 후원자와 연결된 1 대 1 통장을 만들어 스스로 관리하게 했습니다. 물론 통장은 선생님들이 맡아주긴 
하지만 돈을 넣는 것도 빼는 것도 자신이 알아서 하기 때문에 개인별로 차이가 많이 납니다. 수시로 누가 얼마나 모았는지 
공개하고 본인 통장을 확인하게 하기 때문에 경쟁심리도 작용하죠. 후원금은 사람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후원자들에게 
본인이 하는 만큼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도 가르칩니다. 절약정신도 기르고 경제관념도 키우고 돈 모으는 
재미도 알고 결연통장이 아이들에게는 자립훈련인 셈이죠.”
진여원 아이들이 선물한 혜원 스님 생일 축하 카드.
진여원 아이들이 선물한 혜원 스님 생일 축하 카드.
스님은 아이들에게 통장은 돈 이상의 의미라고 말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기댈 부모가 없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는 통장이 부모 역할 대신입니다.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버팀목인 셈입니다. 자립할 기반이 없으면 자칫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됩니다. 2007년부터는 저소득층 아동이 매달 저축한 
만큼 정부가 같은 액수를 적립해주는 디딤씨앗통장도 만들어져 우리 아이들은 통장 2개를 갖게 됐습니다. 진여원 예산이 
아무리 빠듯해도 아이들 디딤씨앗통장에 매달 3만원씩은 꼭 적립을 해주기 때문에 정부지원금까지 해서 디딤씨앗통장에는 
매달 6만원이 적립됩니다. 퇴소 때까지 디딤씨앗통장으로 1000만원, 1 대 1 결연통장으로 1000만원 모아주는 것이 
목표입니다. 2000만원이면 방 한 칸 얻을 수 있는 보증금은 되겠다 싶어서입니다.”

목표액을 채우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불황 탓인지 후원이 예전 같지 않다. 
기업 후원도 수도권에 몰리고 지방은 구경하기 어렵다. 스님은 아동복지시설에 대한 정부 지원이 많이 아쉽다고 호소했다. 
노인복지 등은 모두 중앙으로 환원된 상태인데 아동복지만 지방자치체 소관인 탓에 지원급여도 낮고 지자체별로 차이도 많다.
특히 경제자립도가 낮은 충북은 가장 열악하다고 했다. 기업 후원을 유도할 수 있는 소득공제도 100%에서 50%로 줄었다. 
스님은 “정치헌금은 100% 소득공제를 해주면서 복지법인 후원금을 50%로 줄인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원이 줄다보니 아동복지시설도 점점 없어지는 추세입니다. 충북만 해도 통틀어 10군데도 안 됩니다.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 갈 곳이 없어요”라며 “노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아동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님은 전국 재소자들을 돕는 조계종 교정교화전법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주일에 이틀은 원주·청주교도소 등을 다니며 재소자들을 위한 법회와 상담을 맡고 있다. 
“한 명의 범죄자에게 들어가는 비용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아이 한 명을 잘 키울 수 있습니다. 
아이를 잘못 키우면 사회적 비용이 엄청납니다. 
걷잡을 수 없는 비용이 되기 전에 아이에게 투자해 제대로 된 일꾼으로 키우는 것이 사회적 비용도 훨씬 적게 듭니다. 
거시적으로 봐야지요. 정부는 잘 생각해야 합니다.”

스님은 진여원의 아이들에게 악기든 운동이든 공부든 적어도 일반 가정의 아이들이 누리는 만큼은 해주려고 한다. 
충주시 한 치과의 후원으로 8년째 치아교정도 해주고 있다. 2007년에는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원생들을 모두 데리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후원자들 중에는 우리 아이도 못 보내는 호사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여행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자존감이 엄청 올라갔습니다. 시설에서 지내는 것을 이젠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행 다녀온 후 시설에 학교 친구들도 막 데려오더라고요.”

아이들이 처음부터 마음을 쉽게 연 것은 아니었다. 스님의 진심이 통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처음 와서 한 일이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조건을 하나하나씩 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용돈을 지급하고 귀가시간을 정하는 
대신 외출·외박을 허락해줬습니다. 스킨십을 최대한 많이하고 무엇보다 대화를 많이 나눴습니다. 하모니카부터 시작해서 
오카리나, 플룻, 바이올린도 같이 배우고 인라인스케이트도 같이 탔어요. 같이 하니 아이들이 더 재미있어했습니다. 
뭐든 아이들이 더 잘해요. 에스보드도 저는 몇 달 연습해도 안 되는 것을 아이들은 한나절이면 배우더라고요.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연예인 소식도 알아야 하고 최신 인기가요 순위도 좍 꿰야 해요. 
아이들이 진정성을 알고 마음을 열었습니다.”
혜원 스님은 아이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라고 말했다.
혜원 스님은 아이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라고 말했다.
혜원 스님은 고등학교 때부터 절에 다니다 동국대 불교학과를 입학했다. 전남 광양의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대학에 들어가면 
정신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공사판을 뛰면서 학비를 벌었다. 
부적 써주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부적발이 잘 듣는다는 소문이 나 수입이 쏠쏠했다. 학비 하고 술값도 내고 부모님 용돈까지 
드렸다. 졸업 후 낙엽 덮고 노숙하면서 ‘나’를 찾아 전국을 두 바퀴를 돌다 결국 강원도 월정사에서 출가했다. 
원주에 있는 성불원에 있다가 성불복지회가 진여원을 인수하면서 아이들과 인연을 맺게 됐다.

“진여원에 와보니 조립식 건물 하나에 온통 쓰레기 천국이었습니다. 쓰레기 치우는 데만 몇 년이 걸렸어요. 
야채 살 돈이 없어서 농사도 엄청 지었습니다. 고추 농사, 매실 농사 안 지어본 농사가 없습니다.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가장 힘든 것은 아이들과 소통이 되지 않을 때입니다. 
말 안 듣고 가출하고 사고를 쳐도 괜찮지만 소통이 단절되면 해결 방법이 없어요
아이들이 잘못되면 결국 사회적 책임으로 돌아옵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라면서 말했다. 
“출가 전에 어쩌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것이 아닌가, 세상을 피해 절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출가해 오히려 세상과 섞이고 아이들과 섞여서 살고 있습니다. 
부처는 결국 세상 속에 있었어요. 부처를 찾아 절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던 거죠. 
산에 모셔져 있는 죽은 부처가 아니라 아이들에게서 살아있는 부처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