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01.03 선우 정 국제부장)
재벌 딸이 구속됐다
이제 그녀의 威勢에 힘없이 回航을 선택한 '長'들을 생각해 보자
법적 권력을 가졌던 그들은 정말 '未生'인가
재벌 딸이 구속됐다. 그러니 분노를 조금 접고 그간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나눴으면 한다.
재벌 가족은 아닐지라도 '장(長)' 명찰을 단 분들의 체면과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그날 비행기엔 많은 장(長)이 있었다.
하지만 기내에서 법적 권한을 가진 장(長)은 기장과 사무장뿐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장(長)들은 '대주주 딸'이라는 위세에 밀려 승객 안전을 위한 법적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욕설과 삿대질로 3m나 밀렸다고 하니 사무장의 행동은 마음으론 이해한다.
하지만 벽을 사이에 둔 기장의 결정은 의문이다. 사무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기장에게 회항을
요청하면서 '그분(조현아)이 욕설로 하기(下機)를 요구했다'는 이유를 설명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기장은 "상황을 몰랐다"고 검찰에서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이 무엇이든 기장은 그날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운명의 날은 또 있었다. 회항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날이다.
사람들은 사무장에게 책임을 전가한 회사 사과문이 국민 정서에 불을 지른 날로 기억한다.
당시 대주주인 회장은 해외에 있었다. 그러니 국내의 최고 책임자는 사장이었다.
이런 분이 이제껏 사람들의 관심조차 못 끈다.
사죄 책임이 '부하 교육을 잘못한' 사장이 아니라 '딸 교육을 잘못한' 회장에게 돌아간 것도 생각해 보면 한국적이다.
다들 '기장처럼 사장 역시 사주 가족이 시키는 대로 했을 거야' 하고 비판을 접어둔 것이다.
기장이나 사장이나 그날 권한을 가졌던 장(長)들은 국민 인식 속에 이 정도 위치에 불과하다.
얼마 전 TV를 보다가 이영작 전 한양대 석좌교수의 말에 공감했다.
"승객 안전을 누가 책임져요? 기장과 사무장이지. 그럼 경찰을 불러서 조현아를 쫓아냈어야지. 왜 자기가 내려?"
물론 우리는 다 안다. 우리 기업 문화에선 목을 걸어야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을.
공감한 것은 마지막 코멘트였다. "만약 사무장이 아니라 조현아가 쫓겨났다고 생각해봐요.
그럼 회사는 지금 하늘을 날고 있을 거예요."
여동생 전무님이 다짐대로 정말 복수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건방진 재벌 딸을 혼내주고 회사를 구한 기장과 사무장은 이 시대의 영웅이 됐을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해피엔딩 스토리"라고 웃을 수 있다.
그런데 비슷한 샐러리맨 영웅담은 기업 역사가 긴 나라에서 종종 일어난다.
샐러리맨이 창업가의 방탕한 후계자를 몰아내고 세계 일류로 키운 회사가 일본의 자동차 회사 혼다다.
창업가의 후계자가 제 몫을 할 때까지 샐러리맨들이 자리를 차고앉아 기업을 세계 정상에 올린 스토리는 도요타에서 전개됐다.
실력이 피보다 진한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 상속세가 존재하는 이상 재벌의 지배력 약화는 필연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들의 빈자리를 보완해야 기업이 존속할 것 아닌가.
한국의 샐러리맨을 그날의 장(長)들로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다.
책임을 재벌 딸에게 묻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권한을 포기한 책임자를 피해자로 간주하는 여론은 역설적으로 한국의 샐러리맨을 한없이 비참하게 만든다.
장(長) 명찰을 달아봤자 모두 '미생'에 불과하다는 의식이 우리 젊은 세대에게 어떤 득(得)이 되는지도 의심스럽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빈부귀천 없이 원칙에 따라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런가.
물질적 권력의 극단적 행태를 부각해 법적 권력을 평가절하하고,
상위 극소수 이외엔 허세(虛勢)이고 약자(弱者)라는 집단 비하에 빠진 것이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존재인가.
구속된 재벌 딸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재벌 딸의 병적 히스테리에 밀려 법적 권한을 포기한 '장(長)'들을 동정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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