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1372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50] 폭풍우를 뚫고서

조선일보  2024. 10. 1. 00:04 어둑한 가을밤, 갑작스레 천둥 번개가 내리치며 비가 쏟아진다. 허리에 뿔피리를 찬 목동과 속이 훤히 비치는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아가씨가 겉옷을 우산 삼아 비를 피해 황급히 달린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가씨의 눈동자에는 불안이 가득한데, 그런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줄 모르는 목동은 지금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분간할 틈도 없이 그저 행복에 젖었다. 19세기 말, 프랑스 아카데미 화풍을 이어받은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코트(Pierre Auguste Cot·1837~1883)는 1880년 이 작품을 파리 살롱에 전시했다. 눈 높은 평론가들은 진부하다 혹평했고, 또 다른 평론가들은 과연 이 남녀가 당시 유행하던 프랑스 소설의 주인공들인지, 아니면 ..

침묵했던 여성 작가[이은화의 미술시간]〈338〉

동아일보  2024. 9. 25. 23:03 재밌고 인상적인 나무 조각이다. 세 여자, 어린 소녀, 강아지가 나란히 서 있다. 가운데 여자 얼굴엔 여성의 흑백사진이 붙어 있고, 양옆 두 여자는 얼굴이 여러 개다. 모두 눈은 크게 뜨고 있지만 입은 꼭 다물었고, 상자에 갇힌 듯이 포즈가 뻣뻣하고 부자연스럽다. ‘여자들과 개’(1963∼1964년·사진)는 베네수엘라계 미국 조각가 마리솔의 대표작이다. 본명은 마리솔 에스코바르인데 ‘마리솔’로 불린다. 그녀는 1960년대 미국 팝아트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1980년대 이후로는 거의 무명으로 전락했다. 마리솔의 작품 속 여성들은 이렇게 틀에 갇혀 침묵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이는 어린 시절의 비극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

설마했는데…“이건 충격” 황제의 돌발행동, 다음 행보 더 놀라웠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편]

헤럴드경제  2024. 8. 24. 00:12 [역사편 118.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왕관 낚아채 스스로 머리에 쓴 황제 정복하고 또 정복…신들린 전쟁 영웅 결정적 오판에 일순간 추락해버리고 ‘탈출’ 드라마 썼지만…재역전 못했다 스스로 왕관을 쓰다 그 순간, 모두가 숨을 죽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전쟁광이자 전쟁영웅, 최고 전략가이자 잔혹한 침략자인 그는 교황 비오 7세의 손에서 왕관을 빼앗듯 낚아챘다. 당황한 교황을 뒤에 둔 채 이를 스스로 제 머리에 씌웠다. 자기가 황제 나폴레옹 1세로 오르는 건 신의 축복 따위가 아닌 본인 힘 덕이라는 양. 1804년, 12월. 나폴레옹은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戴冠式)을 치렀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 때였다. 대관식이란 국가 지도자가 된 ..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44] 책 읽는 철학자

조선일보  2024. 8. 12. 23:56 렘브란트(Rembrand van Rijn·1606~1669)의 그림은 작은 사진으로만 봐도 왜 그를 ‘빛의 화가’라고 부르는지 깨닫게 된다. 어두운 실내와 밝게 빛나는 창밖 사이의 이토록 극적인 명암 차이를 물감으로 만들어 냈다니 놀랍다. 실제로 미술관에 걸려있는 렘브란트의 그림은 흘깃 봐도 홀로 밝게 빛나서, 어딘가 조명을 감춰두고 거기에만 불을 비춘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될 정도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이렇게 황금빛이 찬란한데 눈을 찌르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고 고요한 빛을 현실에서는 본 적이 없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철학자가 있다. 돌을 깎아 만든 아치형 천장의 모서리가 닳아 무뎌졌고, 마룻바닥의 틈새가 많이 벌어진 걸 보니 오래된 건물인 모양이다. 책..

영끌하다 ‘벼락거지’ 된 男…수백년 뒤 2000억대에 ‘대반전’ [0.1초 그 사이]

헤럴드경제  2024. 8. 4. 00:20 ⑬ 렘브란트 판 레인 ‘기수’ 蘭 정부 주도 2300억에 매입 ‘마르텐… 초상’ 2100억에 佛·蘭 공동 소유 보유 자산만 3경원으로 추정되는 세계적인 유대계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가문, 그리고 네덜란드의 국보급 거장 렘브란트 판 레인(1606~1669·Rembrandt Van Rijn). 이 둘에 대해 듣고 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단박에 작품 두 점을 연상하게 될 거라는 것이죠.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 중에 역대급으로 비싸게 팔린 그림으로 꼽히는 두 점의 회화이기도 합니다. 바로 ‘마르텐 솔만스와 오프옌 코피트의 초상’(1634)과 ‘기수’(1636) 입니다. 작품당 무려 2000억원이 넘는 값에 거래됐거든..

“내 딸 이 꼴로 둘 수 없어!”…女모델 ‘흘러내리는’ 어깨끈, 엄마까지 오열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존 싱어 사전트 편]

헤럴드경제  2024. 7. 27. 00:11 작품편 114. 존 싱어 사전트 ‘셀럽 섭외’ 아름다운 초상화의 비밀 회심의 작품이었는데… 욕이란 욕만 다 먹었다? 마담 X 에드워드 달리 보이트의 딸들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부인. 제가 당신을 그려도 되겠습니까?" 1882년께, 프랑스 파리의 파티장. 화가 존 싱어 사전트가 비르지니 아멜리 아베뇨 고트로 부인에게 곧장 다가가 물었다. 당시 사전트는 스물여섯 살, 고트로는 스물둘 나이였다. 사전트의 갑작스러운 말에 고트로는 물론,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많은 사람들도 함께 놀랐다. 고트로는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였다. 새하얀 피부가 매혹적인 미인이었으며, 남편을 두고도 남자가 끊이질 않는 팜 파탈의 여인이었다. 고트로는 눈에 띄는 외모는 물론, 옷도..

“돼지가 사람을 희롱한다?” 경악스런 장면…대체 무슨 이유인지 추적해봤더니[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히에로니무스 보스 편]

헤럴드경제  2024. 7. 20. 00:11 [작품편 113. 히에로니무스 보스] ‘희대의 문제작’ 숨은 진실 추적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바보들의 배 건초 마차 이것은 서양 미술사 최고의 문제작이다. 언뜻 봐선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짐작이 가질 않고, 대체 왜 이렇게까지 표현했는지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오죽하면 악마의 대변자가 그렸다는 말까지 돌았을까.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세폭화(Triptyque),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이다. 왼쪽 그림은 그나마 잔잔해보인다. 왼쪽 작품을 밑에서부터 삼등분으로 나눠볼 때, 먼저 절대자와 벌거벗은 남녀가 눈에 들어온다. 이는 하나님, 그리고 그가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이브를 소개하는 장면으로 여겨진다. 이들 근처에는 별별 기이한 형태의 생물..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39] 환전상과 그의 아내

조선일보  2024. 7. 8. 23:50 오늘날의 벨기에 루뱅에서 태어나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했던 퀜틴 마시스(Quentin Matsys·1466~1530)는 15세기 말 16세기 초, 벨기에와 네덜란드, 프랑스 북부에 해당되는 플랑드르 지역 화단을 대표했던 화가다. 그림의 주인공은 환전상 부부. 남편이 갖은 모양의 동전을 쌓아두고 저울에 하나씩 무게를 달아 보자, 바로 옆에서 성경을 읽던 아내는 책장을 넘기다 말고 저울에 정신을 뺏겼다. 귀족의 옷차림은 아니나 모피와 부드러운 벨벳, 장신구 등을 보니 환전업으로 넉넉한 부를 일군 부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은 돈과 믿음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 중이다. 이 그림은 원래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인데 지금은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