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1372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61] 떠도는 도시들

조선일보 2024. 12. 16. 23:51 ‘보따리를 싼다’는 말은 하던 일을 완전히 그만두고 떠난다는 뜻이다. 그곳이 어디든 머물던 데서 완전히 떠나려면 아쉽고 서글프다. 어린 시절,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한 미술가 김수자(1957~)는 보따리를 싸고 푸는 일에 익숙했지만, 여러 번 했다고 해서 떠나는 일이 수월해지는 건 아니다. 1997년, 김수자는 보따리 수백 개를 트럭에 싣고 그 위에 올라타, 유랑하듯 머물다 떠났던 전국 방방곡곡을 11일 동안 달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불을 펼쳐두면 안락한 잠자리가 되지만, 그 이불보에 물건을 챙겨 묶으면 이별을 앞둔 보따리가 됐다. 보따리 안에는 한 사람의 아침에서 밤까지, 탄생에서 죽음까지, 사랑에서 이별까지 삶이 고스란히 담겼다. 김수자는 ..

“감히 날 무시해!” 홧김에 파놓은 함정 때문에…결국 온세상 난리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트로이 전쟁 편]

헤럴드경제  2024. 12. 7. 00:10 [132 신화편. 트로이 전쟁①] 세기의 결혼식 불청객이 굴린 황금사과 ‘불화 여신’ 놓은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세 여신, 황금 사과 놓고 아름다움 경쟁 ‘가장 잘 생긴 인간’에게 심판 맡겼는데 이 결정이 트로이 전쟁 부르게 될 줄은 에블린 드 모건 벤저민 웨스트 가정의 여신 헤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때마침 이를 보고 있었다. 동그란 녀석은 얄궂게도 세 명의 여신 앞에서 탁 멈췄다. 세 쌍의 눈은 이제 사과에 쓰인 글씨를 읽고 있었다. “이 사과를 가장 아름다운(최고의, 가장 올바른, 제일 아름다운) 여신에게 바칩니다.” 프티아의 왕 펠레우스, 바다를 수호하는 신 네레우스의 딸 테티스의 결혼식이 치러진 펠리온산. 하객으로 ..

[포토] 우주로 발사된 최초의 AI 예술 작품 공개

한국경제  2024. 11. 19. 16:05 19일 서울 종로구 트윈트리타워 A동에서 열린 '2024 아트코리아랩 페스티벌'에서 관람객들이 아우치의 '휴먼 셀 아틀라스 : 우주로 발사된 최초의 AI예술을 관람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인공지능(AI)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간의 37.2조 개 세포를 데이터로 표현한 인류의 예술적 자화상을 그린 작품으로 지난 2월 스페이스X의 팰컨9 로켓에 실려 우주로 발사된 최초의 AI예술작품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오는 23일까지 아트코리아랩과 디파이브에서 '2024 아트코리아랩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지난해 10월 개관한 예술 특화 종합지원 플랫폼 '아트코리아랩'의 1년 간 성과를 공유하고 예술과 기술, 산업의 융합을 주제로 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평화로운 전원 배경의 부부 초상화가 폭로하는 건… 땅을 사랑한 정략결혼[양정무의 미술과 경제]

동아일보  2024. 11. 5. 22:57 18세기 부동산 소유욕 부각한 그림 英 게인즈버러 ‘앤드루 부부’ 초상화… 대농장 배경으로 자신감 있는 표정 화가는 앤드루 부인 가문의 채무자 그림으로 갚으며 불편한 감정 녹여 땅에 대한 욕망을 가장 잘 담은 작품이라면 18세기 영국 화가 토머스 게인즈버러가 그린 ‘앤드루 부부’ 초상화가 아닐까 한다. 평범한 부부 초상화처럼 보이지만 배경에 보이는 드넓은 땅 모두가 이 부부가 소유한 거대한 농장이다. 실제로 그림 속에서 땅을 그린 부분이 크게 강조되어 있어,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을 중심으로 부부 초상화를 그렸다는 점에서 독특한 삼중 초상화라고 불릴 만하다. 앤드루 부부는 자신들의 집과 대농장 사이에 있는 오크나무의 벤치에 앉거나 기대어 자세를 취하고 있다. 보..

[황정수의 그림산책]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국제신문  2024. 11. 3. 19:18 황정수 미술평론가 올해는 채색화의 선구자 천경자(千鏡子, 1924~2015) 화백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미술계가 힘을 합쳐 회고전이라도 준비해야할 기념비적인 해이지만,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된 행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과 고흥군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지만 한국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한 모습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천경자의 말년을 괴롭게 했던 미인도 위작 사건과 작품세계에 대한 오해와 편견의 탓이 크다. 작가의 가슴에 큰 상처를 준 위작 사건은 결국 화가를 화단에서 모습을 감추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작품 감정에 불성실하고 불분명한 결론을 내린 한국화단은 무능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천경자는 여성화가 불모시대였던 근..

“파리 정복” 꿈꿨는데 세상 평정…780억 사과의 정체 [0.1초 그 사이]

헤럴드경제  2024. 10. 20. 00:01 ⑮ 폴 세잔 여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사과 그림이 있습니다. 새하얀 테이블보 위에 놓여 있는 생생한 색감의 사과 여러 개. 그저 사과를 사과답게 그린 것 같은 이 작품은 1999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당시 우리 돈으로 무려 약 780억원에 판매됐습니다. (그림 한 점의 가격이 오늘날 20억원대 서울 강남 아파트 39채 값과 맞먹는 겁니다.) 그래서 최고가에 거래된 정물화로 이름을 당당히 올리기도 했는데요. 도대체 무엇이 화폭에 담긴 사과를 그토록 특별하게 만들었던 걸까요.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자신의 그림이 이렇게 어마 무시한 금액에 거래될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요.세상에서 가장 비싼 이 정물화를 그린 작가는 폴 세잔(PAUL CEZANNE·18..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52] 천재는 외롭다

조선일보  2024. 10. 14. 23:50 화가이자 수필가 천경자(千鏡子·1924~2015)는 1979년 4월부터 7월까지 매주 조선일보에 인도와 중남미를 두루 여행하며 남긴 그림과 기행문을 기고했다. ‘원색 기행’이라는 제목답게 지면에는 낯선 풍물을 호방하게 담은 천경자의 그림이 큰 컬러 화보로 실렸고, 화가의 글은 그림만큼이나 다채롭고 감각적인 묘사로 가득했다. 첫 여행지는 인도 뉴델리. 뉴델리에서 처음 방문한 곳이 바로 동물원이었다. 그는 ‘화려한 새들과 백호, 힉힉거리는 표범을 바라보면 속이 후련해졌다’고 썼다. 천경자는 연보랏빛 화면 위에 온갖 동물을 자유롭게 그려 넣었는데, 그 형태를 단순화하면서도 각각의 특성을 살렸고, 낯선 수풀과 어우러진 원색의 향연이 머나먼 인도 땅의 이국적 정서를 ..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51] 변화의 시작

조선일보  2024. 10. 7. 23:54 20세기 중반, 가장 혁신적인 당대의 미술을 열정적으로 후원했던 전설적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은 1951년, 고국 미국이 아니라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미술관을 지어 자신의 컬렉션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18세기 대저택을 구입해 만든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은 베네치아 중심 수로인 카날 그랑데에 면해 있다. 미술관의 작은 정원에 어둠이 내리면 이탈리아 미술가 마우리치오 난누치(Maurizio Nannucci·1939~ )의 네온사인이 환히 빛난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읽으면 장소의 변화에 따라 시간이 변하고, 그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면 급기야 미래가 변한다는 뜻이 된다. 사람이 살아가며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공간, 시간, 인간의 삼간(三間)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