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디자인·건축

[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산업·예술 통합한 독일공작연맹이 ‘창조 학교’ 일궜다

바람아님 2019. 4. 4. 08:40
[중앙선데이] 2019.03.02 00:21

독일공작연맹
‘산업 스파이’ 외교관 등 3인방
예술연맹 본따 ‘공작연맹’ 결성
새 건축예술 통해 근대화 모색

바우하우스
‘모든 예술 건축 밑으로’목표
수공예가 양성도 내세우다
점차 ‘창조학교’로 정체성 확립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5>
오늘날 디자인 관련자들은 바우하우스를 아주 자연스럽게 ‘디자인 학교’라 여긴다. 근대적인 의미의 ‘산업 디자인’ 개념이 체계적으로 실천된 것은 독일 바우하우스 설립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우하우스 창립 당시만 해도 디자인 학교를 세우겠다는 시도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디자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디자인’에 해당하는 독일어 ‘게슈탈텐(gestalten)’이란 단어는 바우하우스 문헌에서 가끔 보인다. 그러나 일상적 단어 사용일 뿐이다. 의도적으로 사용한 전문적 개념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디자인 학교’로서의 바우하우스는 후대 디자이너들의 오마주인 셈이다.
 
설립 당시의 의도로 본다면 바우하우스의 핵심 단어는 ‘건축(Bau)’이다. ‘바우하우스(Bauhaus)’라는 학교 이름 자체가 ‘건축학교’를 뜻한다. 설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부터 건축가였다. 그가 바우하우스를 설립할 당시 작성한 교육프로그램을 보면 ‘건축학교’를 세우고자했던 의도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교장에 취임하자마자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한 팸플릿 성격의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그가 선언한 바우하우스의 설립 목적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모든 예술의 건축으로의 통합’이다.
 
 
학교 설립 이념에 ‘국가주의’를 담아
 
1 ‘산업 스파이’ 헤르만 무테지우스. 영국의 ‘주거 예술과 산업 연맹’을 흉내내 독일공작연맹 창설에 앞장섰다. 그의 주장은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의 핵심을 이룬다. 2 아르누보를 독일에 소개한 벨기에의 스타 건축가이자 공예가 헨리 반 데 벨데. 그로피우스에게 자신의 공예학교 후임을 제안했다. 3 독일 전자회사 AEG의 디자인 책임자 페터 베렌스. 그로피우스는 그의 조수였다. 4 페터 베렌스가 설계한 베를린 AEG 터빈공장은 근대 건축의 효시로 여겨진다. 철골·유리·시멘트로 세워진 이 건물은 그로피우스의 건축설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 윤광준] 5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발터 그로피우스.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1 ‘산업 스파이’ 헤르만 무테지우스. 영국의 ‘주거 예술과 산업 연맹’을 흉내내 독일공작연맹 창설에 앞장섰다. 그의 주장은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의 핵심을 이룬다.

2 아르누보를 독일에 소개한 벨기에의 스타 건축가이자 공예가 헨리 반 데 벨데. 그로피우스에게 자신의 공예학교 후임을 제안했다. 3

 독일 전자회사 AEG의 디자인 책임자 페터 베렌스. 그로피우스는 그의 조수였다.

4 페터 베렌스가 설계한 베를린 AEG 터빈공장은 근대 건축의 효시로 여겨진다. 철골·유리·시멘트로 세워진 이 건물은 그로피우스의 건축설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 윤광준]

5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발터 그로피우스.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바우하우스는 모든 예술적 창조성을 통합하려한다. 모든 예술분야의 교육(조각·회화·공예·수공업)을 묶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요소로 이루어진 새로운 건축예술(Baukunst)로의 재통합을 위해 노력한다. 비록 오래 걸리겠지만, 바우하우스의 궁극적 목적은 기념비적 예술과 장식적 예술의 구분이 사라지는 통합적 예술작품, 즉 ‘대건축(der große Bau)’에 있다.”
 
‘모든 예술분야를 건축으로 통합’하겠다는 대담한 선언을 했지만, 그로피우스의 임기 중에 바우하우스에서 체계적으로 건축교육을 실시했던 적은 없다. 바우하우스에 건축 공방의 공식적 설치는 설립 후 5년이 지난 1924년에야 논란 끝에 겨우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 데사우로 학교가 이사하면서 또다시 흐지부지됐다. 바우하우스에서 체계적인 건축 수업이 시작된 것은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떠나고 2대 교장인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1889~1954)가 취임한 1927년부터다.
 
‘건축의 날개 아래 모든 예술의 통합’이라는 그로피우스의 원대한 꿈은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의 3번째 페이지에 게재된 라이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1871~1956)의 판화에 잘 표현돼 있다. 파이닝거는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취임하기로 결정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이다. 묵묵하지만 자상한 성격의 파이닝거는 저돌적인 젊은 그로피우스의 훌륭한 조력자였다.
 
파이닝거의 판화에는 고딕풍의 성당이 가운데 높이 자리 잡고 있다. ‘대건축’을 의미하는 성당 아래로는 기타 예술분야를 의미하는 작은 건물들이 있다. 성당 뒤로 빛나는 세 별은 조각가·화가·건축가로 봐야 한다.
 
그로피우스가 ‘대건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사실 상당히 당황스러운 일이다. 중세의 거대한 성당건축이나 포츠담의 상수시(Sanssouci) 궁전과 같은 왕궁의 건축을 염두에 두고 쓰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피우스를 비롯한 바우하우스 사람들이 건축한 건물들은 그런 ‘대건축’과는 전혀 상관없는 건물들이다. 그로피우스가 대건축의 모범으로 염두에 두었다고 여겨지는 건축물은 그의 스승 페터 베렌스가 설계한 베를린 AEG 터빈공장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건물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이 또한 중세 성당의 대건축과는 비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로피우스의 ‘건축의 날개 아래 모든 예술의 통합’이나 ‘대건축’과 같은 뜬금없는(!) 개념들은 당시 독일의 공예산업 및 건축영역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던 건축가이자 프로이센 외교관이었던 헤르만 무테지우스(Hermann Muthesius·1861~1927)의 영향으로 봐야한다. ‘건축의 날개 아래 모든 예술의 통합’ 같은 주장은 1902년 출간된 무테지우스의 책 『양식 건축과 건축 예술(Stilarchitektur und Baukunst)』에 이미 자세히 언급돼 있다. 그로피우스는 독일 사회의 급속한 공업화와 예술, 그리고 수공업자들 사이의 혼란스러운 관계를 자신에 앞서 가장 먼저 고민한 ‘국가주의자’ 무테지우스의 주장을 빌려와 바우하우스의 핵심 교육 프로그램으로 삼았던 것이다. 무테지우스는 새로운 ‘건축 예술’을 통해 영국에 뒤쳐져 있는 독일의 근대화를 앞당기고 싶어했다.
 
그로피우스가 선언한 바우하우스 설립의 두 번째 목적은 ‘수공예가들(Handwerkern)의 양성’이다. 중세 수공업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던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처럼,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의 궁극적 이상이 ‘수공예가’들의 양성에 있다고 교육프로그램에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건축의 날개 아래 모든 예술의 통합’이라는 바우하우스의 프로그램을 표현한 라이오넬 파이닝거의 판화. 가운데 성당은 ‘대건축’을 의미하고 그 아래 작은 건물들은 기타 예술분야를 상징한다.

‘건축의 날개 아래 모든 예술의 통합’이라는 바우하우스의 프로그램을 표현한 라이오넬 파이닝거의 판화. 가운데 성당은 ‘대건축’을 의미하고 그 아래 작은 건물들은 기타 예술분야를 상징한다.

       
“바우하우스는 모든 건축가·화가·조각가를 능력 있는 수공예가나 독립적인 창조적 예술가가 되도록 각자의 능력에 맞춰 교육할 것이다. 아울러 뛰어나고 가능성 있는 공예가들의 노동단체를 만들 것이다. 이 노동단체는 동일한 정신에 기초하여 구조·완성·장식·가구를 포괄하는 전체적 관점에서 건축물을 통합적으로 구성할 것이다.”
 
‘대건축’을 목표로 하는 ‘건축 학교’ 인 바우하우스에서 건축가의 양성을 목표로 하지 않고 ‘수공예가’들을 양성하겠다는 것이다. ‘근대적인 건축학교’와 ‘중세적인 수공예가 양성’이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주 모호하다.
 
이렇게 모순되는 그로피우스의 언어들은 바우하우스의 교육 과정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점차 정리되어 간다. 모순을 지적하는 선생들과의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바우하우스 내부의 가장 강력한 도전자는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1888~1967)이었다. 외부로부터의 집요한 도전도 있었다. 네덜란드 ‘데 스틸 운동’의 리더 테오 반 두스부르흐(Theo van Doesburg·1883~1931)였다. 이 과정에서 ‘수공예가 양성’이라는 목표와 ‘대건축’ 개념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린다.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는 이들과의 내용적·정치적 대립을 통해 ‘디자인 학교’도 아니고, ‘건축 학교’도 아닌 ‘창조 학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간다. ‘경계를 뛰어넘는, 다양한 편집이 가능한 창조학교’로 발전하기 위한 바우하우스의 내용적 대립은 1907년 설립된 독일공작연맹에서 이미 예고됐다. 이른바 ‘규격화 논쟁’이다.
 
독일공작연맹의 결성은 급작스런 공업화와 예술의 존재목적 사이의 갈등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었다. ‘공업화’와 ‘예술’은 서로 모순일 수도 없고, 모순이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독일공작연맹의 암묵적 선언은 1914년 쾰른에서 열린 제1회 독일공작연맹전시회에서 ‘규격화(Typisierung)’를 둘러싼 논쟁을 통해 더욱 분명해졌다. ‘스타일(Style)’대 ‘규격(Type)’이 충돌한 독일공작연맹의 ‘규격화 논쟁’은 예술의 본질은 물론 바우하우스의 정체성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규격화 논쟁’을 다루기 전에 독일공작연맹의 주요 인물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헤르만 무테지우스와 헨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1863~1957), 그리고 앞서 설명한 페터 베렌스다. 이 셋 모두 그로피우스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건축을 공부한 무테지우스는 프로이센 정부가 영국에 파견한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의 ‘산업 스파이’에 가까웠다. 영국의 앞선 문명, 특히 건축과 실내 인테리어, 공업생산품의 품질 등에 관한 정책적 자료를 샅샅이 모아 프로이센 정부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고 1896년부터 1903년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산업화와 관련된 영국의 시행착오를 나름의 방식으로 요약한 무테지우스가 귀국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바로 독일공작연맹의 결성이었다.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으로 결성된 ‘주거 예술과 산업 연맹(Home Arts and Industries Association)’을 흉내 낸 독일공작연맹은 뒤처진 독일의 산업과 예술, 그리고 공예를 어떻게든 영국과 프랑스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공업화·예술 서로 모순 안 된다’ 선언
 
반 데 벨데는 좀 특이한 경우다. 그는 벨기에 출신으로 당시 아르누보의 스타 건축가이자 공예가다. 아르누보를 독일에 소개하여 ‘유겐트슈틸’이 가능케 한 인물이기도 하다. 파리와 베를린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는 1901년 작센 공국의 초청으로 바이마르에 오게 된다. 당시 작센 공국의 빌헬름 에른스트 대공(Wilhelm Ernst·1876~1923)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1906년 작센 대공 공예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 교장에 취임한다. 공예학교 바로 맞은 편의 작센 대공 미술대학 건물도 반 데 벨데가 직접 설계해 신축한다. 지난 호에 설명한 대로 이 두 학교는 1919년 바우하우스로 통합된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제국 경기병 연대의 장교로 참전하고 있던 그로피우스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올 것을 제안했다.
 
헤르만 무테지우스, 헨리 반 데 벨데, 그리고 페터 베렌스. 독일공작연맹을 주도한 이 세 사람은 오늘날 ‘산업 디자인’이라 불리는 새로운 영역을 준비한다.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라는 ‘창조 학교’는 이 세 사람이 대립하고 협력한 결과물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디플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 자유대 전임강사, 명지대 교수를 역임했다. 2012년, 교수를 사임하고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에서 일본화를 전공했다. 2016년 귀국 후, 여수에 살며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작은 배를 타고나가 눈먼 고기도 잡는다. 저서로 『에디톨로지』『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남자의 물건』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