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디자인·건축

[글로컬 라이프] 사진 찍기 딱 좋은 곳인데 촬영 규제하는 뉴욕 베슬(Vessel)

바람아님 2019. 4. 2. 09:04
조선일보 2019.04.01. 03:12
오윤희 뉴욕특파원

지난 23일 미국 뉴욕 맨해튼 허드슨 야드(Hudson Yards)에선 아침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서 '베슬(Vessel·사진)' 안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철제 항아리처럼 생긴 이 45m 높이 구조물 안은 2500개의 계단이 혈관처럼 얽히고설키면서 건물 꼭대기까지 이어진다. 건물 바깥에서도 투명 유리를 통해 입장객들이 등산을 하듯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노약자를 위한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서는 곳은 단 3곳뿐이다. 랜드마크 건물 앞이면 흔히 붙어 있는 '손대지 마시오' 대신에 '제발 올라보세요(Please climb on the sculpture)'라고 쓰여 있다.

허드슨 야드 부지는 원래 오래된 철도역과 주차장만 있던 공터였다. 하지만 민간 부동산 개발업체와 뉴욕시가 총 250억달러(약 28조4000억원)를 투자해 황무지였던 지역을 주상 복합 건물, 각종 명품 숍과 레스토랑 등이 입점한 '도심 속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이 허드슨 야드의 중심에 2억달러(약 2255억원)를 들인 베슬이 있다. 허드슨 야드 측은 "파리 하면 사람들이 에펠탑을 떠올리는 것처럼 뉴욕을 상징하는 새로운 건축물을 만들고자 했다"고 밝혔다.

초기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거대한 슈와르마(고기를 빵에 싸먹는 삼각뿔 모양 중동 음식) 같다"는 조롱이 나오는가 하면, 뉴욕타임스는 건물의 효용성에 의문을 표하며 "어느 곳으로도 이르지 못한 계단"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지난 15일 베슬이 일반에게 공개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순식간에 향후 2주치 입장 예약이 꽉 찼다. 현장에 가니 베슬의 인기 비결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온갖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소셜미디어에 전송하기에 바쁜 '스마트폰족(族)'들이다. 친구들과 몰려와 사진을 찍던 10대 여학생은 "모양이 특이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딱 좋다"고 말했다. 개장 5일 만에 인스타그램엔 10만개가 넘는 베슬 사진이 게재됐다.

아이러니는 베슬의 입장 조건이다. 무료입장하는 대신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하면 압수당한다는 것이다. 일부러 올라가라는 권유의 사인을 붙이고 사진을 찍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아름다운 조각물을 만들어놓고, 베슬의 소유권을 가진 허드슨 야드는 19일 저작권 보호를 목적으로 '베슬을 배경으로 한 사진 촬영 및 온라인 유포를 금지한다'는 규정을 발표했다.

그러나 규정은 규정일 뿐 뉴욕 맨해튼의 횡단보도 신호등이 무시되는 것처럼 누구도 셀카를 찍는 데 거리낌이 없다. 도미니크 왕씨는 "베슬은 훌륭한 작품이지만 그걸 찍은 사진은 내 소유물 아닌가"라고 말했다. 또 다른 방문객도 "여기는 공공장소인데 사진 촬영이 왜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경비원들 역시 촬영 금지 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수방관 분위기였다.

베슬을 만든 건축가 토머스 헤더위크는 "베슬은 하루 1700명의 입장객을 받을 수 있다. 이들이 베슬을 걸어 올라가면서 뉴욕의 전경을 만끽하는 경험을 공유하도록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뉴욕의 관광객들이 베슬을 찾아 곳곳에서 온갖 기묘하고 자신만의 행복한 모습으로 셀카를 찍는 한 허드슨 야드의 규제는 성공할 수 없을 것 같다. 역으로 이 규제가 격렬하게 위반될수록 베슬은 더욱 성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