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서거 70주기, 윤동주문학관을 가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흐른다. 유리막 없이 뻥 뚫린 천장에도, 낡은 우물 목판에도, 언덕을 따라 놓인 나무 울타리에도.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9. 청운동에 있는 윤동주문학관이 그러하다.
지난 11일 오후, 윤동주 서거 70주기(2월 16일)를 맞아 이곳에 발걸음 했다.
하늘이 청아하게 맑은 날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 무렵 윤동주문학관 앞에 다다랐다.
하얀색에 살짝 잿빛이 감도는 건물은 작고 아담했다.
지난 2012년 7월에 문을 연 이 문학관은 버려진 수도가압장과 물탱크 시설을 리모델링해 만든 공간이다.
대부분의 문학관과 달리, 작가의 생가가 아닌 장소에 설립된 점이 독특하다.
입장료는 받지 않으며,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매주 월요일과 명절 연휴에는 쉰다.
문학관 주변에는 윤동주의 발자취가 가득하다. 바로 앞 인왕산 둘레길을 따라 20여분 걸으면 그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후배 정병욱(1922~1982)과 함께 하숙했던 소설가 김송(1909~1988)의 집을
마주할 수 있다. 홍미영(43) 윤동주문학관 해설사는 "윤동주는 매일같이 인왕산을
오르내리며 시상(詩想)을 다듬었다고 한다.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오늘날 널리 사랑받는 그의 대표작들이
이때 탄생했다"고 말했다.
문학관 내부는 크게 3개 공간으로 나뉜다.
시인채(제1전시실), 열린 우물(제2전시실), 닫힌 우물(제3전시실)이다.
입구 오른편에 위치한 시인채에서는 윤동주의 삶과 문학 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전시물은 가운데 놓인 낡은 우물 목판.
시인의 생가터에서 가져왔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생애 소개 코너는 9개 전시대로 꾸며졌다.
사진과 친필 원고 등을 통해 윤동주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원고지에 곧고 정갈하게 적어내려 간 그의 글씨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순수하고 강직했던 그의 성품과 닮아 있어서다.
윤동주가 백석 시집 등 자신이 즐겨 읽던 책 안쪽에 해놓은 서명 전시도 흥미롭다.
제1전시실을 나서기 위해 두꺼운 철문을 열면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뚜껑 없는 천장에 하늘과 바람과 햇살과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다.
건물 테두리는 하나의 액자가 된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이 떠오른다.
"(전략)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홍미영 해설사는 "원래 물탱크 자리로,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우물'을 형상화했다.
봄에는 벚꽃이 흩날리고 여름에는 비꽃이 내리는 등 계절감이 살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밤이 되면 북두칠성 등 수많은 별이 보인다. 윤동주의 시 그 자체인 곳"이라고 설명했다.
- ▲ 윤동주문학관 제2전시실. '우물'을 형상화한 공간이다. / 염동우 기자
제3전시실은 어둡고 춥다. 윤동주가 생을 마감한 후쿠오카 형무소처럼 조성된 영상실이다.
천장 한쪽, 작은 틈새로 들어오는 빛이 따스하면서 아리다.
감옥에서 그가 느꼈을 고독과 두려움이 시린 발끝으로 전해져 왔다.
고요한 가운데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공간을 빼곡히 채웠다.
'그는 하오리나 유카타를 입은 조선인을 보면 메스껍다 했다.
친구들이 일본말로 얘기하면 애써 우리말로 대했다.'
문학관을 나서 옆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다.
서울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풍광이 묵직해진 마음을 가볍게 했다.
언덕을 둘러싼 나무 울타리에는 그의 시들이 새겨져 있다.
울타리를 어루만지며 손끝으로 시를 읽었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코스모스)
청년 윤동주의 사랑 이야기일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언덕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차가운 바람과 함께 그의 시가 온몸에 휘감겼다.
>> '별의 시인' 윤동주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4남매 중 장남인 그의 아명은 '해환(海煥)'. 해처럼 밝은 아이라는 뜻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 명동촌은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그는 어린 시절, 독립운동가였던 외삼촌 김약연(1868~1942) 선생이 세운 명동소학교를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윤동주는 어려서부터 시를 좋아한 문학소년이었다. 친구들과 손수 원고를 모아 '새 명동'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등사판으로 펴내기도 했다. 웅변과 축구, 재봉틀도 잘했다. 축구부원들 유니폼 등번호를 재봉틀질로 직접 달아줬다는 재미난 일화도 전해진다.
용정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중학교에 편입한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 표시로 학교를 자퇴한다. 신사참배란 일본이 일황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한국인들이 참배하도록 강제한 일을 말한다.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문과에 입학한 건 1938년이다. 법대나 의대 진학을 원하는 아버지의 거센 반대를 뿌리치고 내린 결정이다. 자신의 꿈을 향한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1942년, 그는 아버지 권유로 일본 유학을 떠나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됐다. '조선어로 시를 쓰며 불온한 사상을 전파했다'는 게 죄목이다.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고된 옥살이를 하다 1945년 2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29세.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
(소년조선일보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