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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단체사진
프란스 할스, <하를럼시 성 게오르기우스 민병대 장교들의 연회>, 1616년, 캔버스에 유채, 324 x 175 cm, 프란스 할스 미술관
헤르브란트 반 덴 데크하우트, <집단 초상화>, 캔버스에 유채, 1657년, 163 x 19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야간순찰> 이야기
렘브란트, <야간순찰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중대)>, 1642년,캔버스에 유채, 363 x 437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야간순찰>에는 총 34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18명만이 그림을 주문한 실제 인물이고 나머지는 렘브란트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 인물이다. 렘브란트는 그림의 생동감과 극적인 감정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그려야하는 인물의 두 배가 넘는 사람을 집어넣어 군중으로 만든 것이다. 북을 치는 사람, 왼쪽 화약운반수로 나온 어린 소년, 대장인 바닝콕의 뒤에 가려진 총병 등의 조연들이 사건의 현실감과 극적 효과를 위해 조연을 하고 있다. (그림의 위쪽 방패에 보면 실제로 이 그림을 의뢰한 인물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그림이 공개 된지 8년 후 덧붙여진 것이다.)
렘브란트,< 야간순찰> 부분, 1642년,캔버스에 유채, 363 x 437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렘브란트, <플로라(플로라의 모습을 한 사스키아의 초상)>, 1634년, 캔버스에 유채, 101 x 125cm, 에르미타주 미술관
렘브란트, <플로라의 모습을 한 사스키아의 초상>, 1635년, 캔버스에 유채, 97.5 x 123.5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야간순찰>의 수난
<야간순찰>은 많은 일을 겪었다. 먼저 <야간순찰>의 제목부터 렘브란트의 의도와는 다르다. 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림에는 제목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18세기부터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으로 이 그림을 불러왔다. 거기엔 몇 가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이 그림의 안료와 광택제 층이 무척 어두워져서 실제 그림이 나타내는 시간에 혼란이 생긴 것이다. 두 번째로는 당시엔 주간순찰이 없어지고 야간순찰만 남아있어서 주간순찰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1940년대에 이 그림의 어두워진 광택제 부분을 깨끗이 청소하여 복원하여 밝아진 그림을 보고 그림의 제목을 정확히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주간순찰> 또는 <시민군의 행진>이라는 제목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모두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에서 느끼던 원작의 아우라에는 미치지 못하여 거절당하고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이 유지되게 되었다. 또한 <야간순찰>이 완성되어 의뢰자들에게 공개 되었을 때 그림의 연극적인 스타일에 의해 기존 단체초상화와는 달리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나거나 어둠속에서 처리된 의뢰자들이 불만을 터트려 그림 값을 지불하기를 거부했다는 일화는 잘못된 것이다. 이 일화는 그의 제자 샤무엘 반 호흐스트라텐(Samuel van Hoogstrarten)이 그의 논문에서 렘브란트의 <야간순찰>에 등장한 조연들에 대한 불평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추측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 바로는 등장인물 모두 그림 값을 지불했고 이 그림이 회의실에 걸리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고 한다.
현재의 <야간순찰>은 렘브란트가 처음 완성했을 때와는 사이즈가 다르다. <야간순찰>은 시민군 회의실에 70년 넘게 걸려 있다가 후에 암스테르담 시청 건물로 옮겨지게 되는데 그림이 할당공간에 걸기에 너무 크다는 이유로 그림의 아래쪽과 오른쪽, 왼쪽이 각각 상당부분 잘려나간 것이다.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던 바닝콕이 원작의 1/36 크기로 복제하여 소장한 그림과 비교해 보면 그림의 잘려나간 부분을 알 수 있다.)
렘브란트, <야간순찰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중대)>, 1642년,캔버스에 유채, 363 x 437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야간순찰> 복제화, 원작의 36분의 1크기
<야간순찰>그 이후
<야간순찰>이 완성된 1642년은 렘브란트의 작품과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 해이다.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가 죽었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 셋도 모두 영아기에 사망했다. 렘브란트는 점차 격정적이고 드라마틱한 바로크 양식을 버리고 내면을 묘사하는 조용하고 깊이 있는 스타일로 옮겨간다. 이후 성숙기에 들어선 렘브란트의 작품들은 심리적 통찰력이 넘치는 자화상 시리즈로 대표된다.
렘브란트, <자화상>, 1660년, 캔버스에 유채, 85 x 111cm, 루브르 박물관
<야간순찰>은 분명히 렘브란트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며 암스테르담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최고의 국보로 추앙되는 그들의 자부심이다.(<야간순찰>은 한 번도 국외로 나간 적이 없다.) <야간순찰>이 소장되어 있는 국립 암스테르담 미술관에는 렘브란트 뿐 만아니라 반 고흐, 요하네스 베르메르 등 15-19세기 네덜란드 거장의 작품들이 5,000점이 소장되어 있지만 명예의 전당으로 불리는 전시실에 교회제단처럼 꾸며진 특별한 곳에 위치한 작품은 바로 <야간순찰>이다. 미술관은 <야간순찰>이 훼손될 때 마다 복구되는 과정을 미술관 유리창을 통해 국민 모두가 볼 수 있게끔 했다. 국립미술관의 최고작품은 신화나 종교를 주제로 한 작품이 아닌 신민군의 초상 바로 <야간순찰>인 것이다. 사실 작품의 주제에 있어서의<야간순찰>은 네덜란드의 한 지역 시민군의 단체초상일 뿐이다. 만약 렘브란트가 당시의 일반적인 단체초상화의 형식으로 <야간순찰>을 그렸다면 그 작품은 아마도 다른 단체초상화와 함께 국립미술관이 아닌 역사박물관에 보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혁신적인 구상과 웅장한 연출로 네덜란드인의 깊은 애정으로 보존되는 걸작을 탄생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