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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순찰>에 등장하는 빛나는 소녀는 누구일까?

바람아님 2015. 4. 6. 08:28

[J플러스] 입력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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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단체사진
하를럼시 성 게오르기우스 민병대 장교들의 연회  프란스 할스(Frans Hals) 캔버스에 유채 324 x 175 cm 프란스 할스 미술관 1616.png 

프란스 할스, <하를럼시 성 게오르기우스 민병대 장교들의 연회>, 1616, 캔버스에 유채, 324 x 175 cm, 프란스 할스 미술관

집단 초상화 헤르브란트 반 덴 데크하우트(Gerbrand Van den Eeckhout)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163 cm x 197 런던 내셔널 갤러리 1657.png 

헤르브란트 반 덴 데크하우트, <집단 초상화>, 캔버스에 유채, 1657, 163 x 19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단체초상화(group portrait)라는 회화 장르가 있다. 17세기, 특히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장르로 카메라가 없던 시절 카메라를 대신해 오늘날의 단체사진처럼 한 캔버스 안에 가족이나 특정 구성원 모두를 그려내는 것이다. 17세기의 네덜란드는 무역으로 인한 번영을 기반으로 부유해진 시민들이 자신의 집을 장식할 그림을 사들이면서 일반시민을 상대로 한 미술시장이 형성된다. 그 시절 가장 인기가 많았던 단체초상화는 주로 비슷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자신들의 초상화를 위한 돈을 똑같이 나누어 냈기 때문에 모두 같은 크기에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다소 어색하게 그려지곤 했다. 오늘날의 단체사진과 다르지 않게 말이다. 또한 단체초상화는 그 규모가 말해주듯 워낙 비싼 그림이었고, 단체초상화에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다는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했기에 웃는 얼굴은 찾아보기 힘들고 거의 모두가 근엄한 모습으로 그려지길 원했다.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형식과 표정을 담고 있던 단체초상화 중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혁신적인 단체초상화가 등장한다. 바로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야간순찰(Night Watch)>이다.


<야간순찰> 이야기

야간순찰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중대)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1642경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363 x 437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png

렘브란트, <야간순찰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중대)>, 1642,캔버스에 유채, 363 x 437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632년 그의 나이 25살에 암스테르담으로 화실을 옮긴 렘브란트는 도착할 당시 이미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고 <해부학강의>를 시작으로 더 큰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는 또한 이곳에서 사스키아 아이렌보크와 만나 결혼한다. 상류층 여성과 유럽 곳곳으로 명성이 퍼질 만큼 유명한 화가와의 만남. 젊은 부부는 윤택하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그의 나이 34살에 암스테르담 시경 본부로부터 <야간순찰>을 주문받았는데 그는 그의 모든 기법을 쏟아 부어 2년 만에 완성시킨다. 렘브란트의 초기 대표작인 <야간순찰>은 기존의 단체초상이 아닌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멈춘 것처럼 극적인 연출을 설정했다. 바로크적인 빛의 움직임과 등장인물들의 포즈를 통해 흥분되고 생생한 감정을 전달한다. 강렬한 조명이 비추는 밝은 부분과 어두운 배경과의 대조로 보는 이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지 않고 그림의 이곳저곳으로 이동하게 한다. 인물들의 표정은 살아있고 그림 속 주요인물 중 정적인 것이 없어 전체적으로 사건과 움직임이 넘치는 화면을 만들어 냈다. 마치 축제에서 행진하듯이 화려한 의상을 입은 프란스 바닝콕이 부사령관에게 행진하라고 명령하는 순간을 담고 있는데, 명령을 내리는 콕의 입이 살짝 벌어져서 있어 명령을 내리는 그 찰나를 보여주고 있다. 대장의 명령과 함께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기수는 깃발을 흔들며, 화약운반수는 달려 나간다. 진행형의 사건을 아주 적절한 시기에 완벽한 구도로 잡아낸듯하다


<야간순찰>에는 총 34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18명만이 그림을 주문한 실제 인물이고 나머지는 렘브란트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 인물이다. 렘브란트는 그림의 생동감과 극적인 감정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그려야하는 인물의 두 배가 넘는 사람을 집어넣어 군중으로 만든 것이다. 북을 치는 사람, 왼쪽 화약운반수로 나온 어린 소년, 대장인 바닝콕의 뒤에 가려진 총병 등의 조연들이 사건의 현실감과 극적 효과를 위해 조연을 하고 있다. (그림의 위쪽 방패에 보면 실제로 이 그림을 의뢰한 인물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그림이 공개 된지 8년 후 덧붙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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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야간순찰> 부분, 1642,캔버스에 유채, 363 x 437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렘브란트가 만들어낸 조연 중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화려한 금빛 드레스를 입고 신비로운 광채를 내고 있는 어린소녀이다. 누가보아도 민병대의 일원은 아닐 것이다. 이 소녀는 누구이며 렘브란트는 어떤 의도로 그림 중앙에 이 소녀를 그려 넣은 것일까? 소녀의 허리에 멘 벨트에는 닭이 매달려 있는데, 거꾸로 매달려 있어 발톱이 강조되게 그려져 있다. 새의 갈고리모양 발톱은 총사길드 컵의 표상으로 말하자면 시민군의 로고와도 같다. 렘브란트는 시민군을 의인화한 소녀의 예상치 못한 등장으로 자신의 작품이 전형적인 시민군 그림으로 보이지 않게 의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소녀의 얼굴은 렘브란트의 다른 작품에도 등장하는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와 닮아있다




플로라 (플로라의 모습을 한 사스키아의 초상)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1634캔버스에 유채101 x 125 에르미타주 미술관.png

렘브란트, <플로라(플로라의 모습을 한 사스키아의 초상)>, 1634, 캔버스에 유채, 101 x 125cm, 에르미타주 미술관



플로라의 모습을 한 사스키아의 초상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 1635캔버스에 유채97.5 x 123.5런던 내셔널 갤러리.png

렘브란트, <플로라의 모습을 한 사스키아의 초상>, 1635, 캔버스에 유채, 97.5 x 123.5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품에서 사스키아를 꽃의 여신 플로라로 여러 번 그려낸 적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렘브란트 의 삶과 예술인생의 여신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렘브란트가 야경을 그릴당시 플로라는 병에 걸리게 되고 야경을 완성한 그해에 30세의 나이로 죽고 만다. 렘브란트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아마도 렘브란트는 아내의 빛나는 영혼을 소녀 얼굴에 담아 아내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야간순찰>의 수난

<야간순찰>은 많은 일을 겪었다. 먼저 <야간순찰>의 제목부터 렘브란트의 의도와는 다르다. 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림에는 제목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18세기부터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으로 이 그림을 불러왔다. 거기엔 몇 가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이 그림의 안료와 광택제 층이 무척 어두워져서 실제 그림이 나타내는 시간에 혼란이 생긴 것이다. 두 번째로는 당시엔 주간순찰이 없어지고 야간순찰만 남아있어서 주간순찰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1940년대에 이 그림의 어두워진 광택제 부분을 깨끗이 청소하여 복원하여 밝아진 그림을 보고 그림의 제목을 정확히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주간순찰> 또는 <시민군의 행진>이라는 제목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모두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에서 느끼던 원작의 아우라에는 미치지 못하여 거절당하고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이 유지되게 되었다. 또한 <야간순찰>이 완성되어 의뢰자들에게 공개 되었을 때 그림의 연극적인 스타일에 의해 기존 단체초상화와는 달리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나거나 어둠속에서 처리된 의뢰자들이 불만을 터트려 그림 값을 지불하기를 거부했다는 일화는 잘못된 것이다. 이 일화는 그의 제자 샤무엘 반 호흐스트라텐(Samuel van Hoogstrarten)이 그의 논문에서 렘브란트의 <야간순찰>에 등장한 조연들에 대한 불평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추측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 바로는 등장인물 모두 그림 값을 지불했고 이 그림이 회의실에 걸리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고 한다




현재의 <야간순찰>은 렘브란트가 처음 완성했을 때와는 사이즈가 다르다. <야간순찰>은 시민군 회의실에 70년 넘게 걸려 있다가 후에 암스테르담 시청 건물로 옮겨지게 되는데 그림이 할당공간에 걸기에 너무 크다는 이유로 그림의 아래쪽과 오른쪽, 왼쪽이 각각 상당부분 잘려나간 것이다.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던 바닝콕이 원작의 1/36 크기로 복제하여 소장한 그림과 비교해 보면 그림의 잘려나간 부분을 알 수 있다.) 


야간순찰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중대)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1642경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363 x 437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png

렘브란트, <야간순찰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중대)>, 1642,캔버스에 유채, 363 x 437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야경복제품.png

<야간순찰> 복제화, 원작의 36분의 1크기



특히 가장 많이 잘려나간 왼쪽 부분을 때문에 원작이 가진 공간감이 부족해지면서 밖으로 행진하는 것 같은 느낌이 사라지게 되었다. <야간순찰>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75년 윌름 드 라이크라는 실직상태의 교사가 검은 옷을 입은 바닝콕을 악마로 여겨 조각칼로 훼손하는 사건이 있었다.(그는 자구 밖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에게 이일을 시켰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또한 1990에는 또 다른 정신이상자가 그림에 산을 뿌리는 사건이 있었는데, 다행히 그림의 광택제 층까지만 산이 흡수되어 다시 그림을 복원 할 수 있었다.


<야간순찰>그 이후

<야간순찰>이 완성된 1642년은 렘브란트의 작품과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 해이다.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가 죽었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 셋도 모두 영아기에 사망했다. 렘브란트는 점차 격정적이고 드라마틱한 바로크 양식을 버리고 내면을 묘사하는 조용하고 깊이 있는 스타일로 옮겨간다. 이후 성숙기에 들어선 렘브란트의 작품들은 심리적 통찰력이 넘치는 자화상 시리즈로 대표된다




자화상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1660캔버스에 유채85 x 111루브르 박물관.png

렘브란트, <자화상>, 1660, 캔버스에 유채, 85 x 111cm, 루브르 박물관

 

<야간순찰>은 분명히 렘브란트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며 암스테르담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최고의 국보로 추앙되는 그들의 자부심이다.(<야간순찰>은 한 번도 국외로 나간 적이 없다.) <야간순찰>이 소장되어 있는 국립 암스테르담 미술관에는 렘브란트 뿐 만아니라 반 고흐, 요하네스 베르메르 등 15-19세기 네덜란드 거장의 작품들이 5,000점이 소장되어 있지만 명예의 전당으로 불리는 전시실에 교회제단처럼 꾸며진 특별한 곳에 위치한 작품은 바로 <야간순찰>이다. 미술관은 <야간순찰>이 훼손될 때 마다 복구되는 과정을 미술관 유리창을 통해 국민 모두가 볼 수 있게끔 했다. 국립미술관의 최고작품은 신화나 종교를 주제로 한 작품이 아닌 신민군의 초상 바로 <야간순찰>인 것이다. 사실 작품의 주제에 있어서의<야간순찰>은 네덜란드의 한 지역 시민군의 단체초상일 뿐이다. 만약 렘브란트가 당시의 일반적인 단체초상화의 형식으로 <야간순찰>을 그렸다면 그 작품은 아마도 다른 단체초상화와 함께 국립미술관이 아닌 역사박물관에 보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혁신적인 구상과 웅장한 연출로 네덜란드인의 깊은 애정으로 보존되는 걸작을 탄생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