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日常 ·健康

[고은의 편지] 운명은 기대거나 뛰어넘는 그 이상

바람아님 2015. 6. 5. 10:22

[중앙일보] 입력 2015.06.05

[일러스트=김회룡]

고 은시인

 

퇴산(退山)에게

 오랜만이네. 만남이 이승이고 헤어짐이 저승이라지만 실지로는 이승에도 만남보다 헤어짐이 훨씬 더 많더군. 자네와의 만남이라는 것도 더 많은 헤어짐 속에 있었던 몇 번의 일 아닌가.

 하도 오랜만이어서 삶의 운명감(運命感)도 생겨나지 말라는 법이 없네그려.

 참, 최근에 나는 저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들었다네. 몇십 년 만이었네. 온몸이 파묻히는 신열(身熱)의 체험 말이네. 몇십 년 뒤의 또 다른 파동을 숨길 수 없었네.

 단 한마디로 단언하고 싶네. 이 태양계 행성의 자전, 공전의 운행이 낳은 불멸의 음악이 바로 ‘운명’이지 않으면 안 되겠네.

 유난히 근현대사를 파란곡절로 살아야 하는 한국인의 정한(情恨)으로써 이 교향곡을 ‘운명’으로 명명해버린 사연이 굳이 어색한 까닭이 없네. 그래서인가 ‘운명’을 듣고 난 이래 내내 운명 혹은 운명론을 들추게 되네.

 이런 신록의 계절에 부적절할지도 모르네. 또한 착잡한 사회현실의 불화 속에서 어떤 추상은 무책임하기까지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운명은 내 등 뒤에서 하도 쟁쟁해져서 멀어질 수 없었네.

 사실인즉 우리는 당대의 하고많은 삶의 사유(思惟)로서의 운명을 정색(正色)의 운명론으로 다가간 적이 별로 없었네. 저 고대 동양에는 천명(天命)사상이나 천운(天運)으로서의 수동적인 자연규범이 있었네. 저 고대 그리스의 모라이라는 그 장엄한 비극성으로 된 운명이 그 감감한 소식이 우리에게 건너오지 않는바 아니었네.

 그럼에도 운명은 하나의 체념이나 의존, 소극의 차원으로 치부해온 적도 없지 않았네. 팔자소관이라는 것도 자조적이거나 해학적으로 말해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따위의 용기는 끝내는 삶의 만용(蠻勇)이기 십상이라네. 운명은 그것과 대결해서 이긴다 진다의 대상이 아니라 더 총합적인 모성이라고 새삼 강조하고 싶네.

 무럭무럭 자라나는 젖먹이 아기에게나 청춘에게 운명이란 말은 외설일지도 모르네. 그래서 운명은 삶의 오전보다 그 오후의 사상에 초대되어야 할 체험의 관념이기도 하네.

 운명 혹은 숙명이라는 말이 뿌리칠 수 없게 유혹적일수록 나는 운명의 의의를 이따금 재정의하고 싶네.

 자 저 태양 정남(正南)의 대낮에 태양을 향해서 두 눈을 부릅떠보세. 곧 눈앞이 캄캄해지고 마네. 이 정도는 약과라네. 정작 태양의 내부온도는 1만5000도이고 그 표면온도는 6000도의 불구덩이 아니겠는가.

 이런 태양의 한갓 자식으로 태어난 이 생명체 행성의 축복은 더도 덜도 말고 태양과 지구 사이의 적정거리에 있네. 그 덕분에 단번에 재가 되지 않는 생명을 시작할 수 있었네.

 어디 이 지구만이 저 혼자 자전, 공전이겠는가. 지구의 부모인 태양 자신은 제 축을 돌며 자전하고 있고 우리 은하의 중심에 의해서 공전하고 있네. 태양의 공전 단위는 2억5000만 년이나 되는 아득한 시간이라네.

 이런 우주 운행과 우주의 영구적인 운율(韻律)로 하여금 운명이라는 관념이 인간에게 얼마나 근원적이겠는가. 자네한테 괜히 허튼소리를 하는지 모르거니와 운명은 그것에 기대거나 그것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그런 것 이상인 바를 지적하고 싶네. 다시 말하면 운명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주관에 앞서서 우주현상의 엄연한 객관적 동작(動作)이란 말일세.

 옛 동양에서는 자연의 행태를 하늘의 이치로 말했네. 하늘의 이치로서 지상의 이치를 삼았네.

 그렇다고 하늘을 의인화(擬人化)한 적은 없네. 다만 지상의 자연법이(自然法爾)와 우주의 무위와 위(爲)를 하나의 운행으로 보았네. 그래서 우주를 집이라고 풀이한 것인지 모르네.

 내가 말하는 운명론은 결코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패배의 논리가 아니네. 나의 바깥과 내 안을 동시에 투시하는 논리가 되어야겠네.

 고백하네만 아직도 내 정서와 의식은 유치찬란하다네. 그런 나머지 ‘우연’ ‘필연’ 그리고 ‘운명’이라는 낱말 앞에서는 늘 가슴이 벅차오른다네. 그것들을 하나하나 따지는 분석 따위를 사절하네. 삶의 역정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풍상들을 관통하는 우리의 이 시간이야말로 운명의 시간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플라톤 『공화국』의 끄트머리에 나오는 에르신화를 떠올리네.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부여받은 것이 다이몬이네. 이것이 세상에 태어난 뒤의 삶을 인도하지만 정작 그것을 의식할 수는 없는 것이네. 불교 유식론(唯識論)의 아뢰야와도 어금버금인지 모르겠네.

 새삼 운명은 삶과 삶 이후를 포괄하는 커다란 명제라고 여긴다네.

 지금 쓰고 있는 것 뒤로 내가 필생의 사업으로 삼고 있는 작업이 바로 수많은 생사의 전개를 잇는 ‘운명’이네. 그런데 아직까지 나는 운명을 모르고 운명 속에 있네. 끝내 운명이란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인지 모르네.

 퇴산. 올해 아니거든 내년에라도 만나세.

고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