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5-6-15
김순덕 논설실장 |
1.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때문이다. 게시물도 메르스 관련 발언이 많다. ‘중동감기’로 불렀다면 이렇게까지 공포스럽진 않았을 메르스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기승을 부린 것은 ‘투명하고 신속한 정보 공개의 실패’ 때문이라고 한국-세계보건기구(WHO) 합동평가단은 지적했다. 한국 정부의 비밀주의가 2003년 사스 창궐 때의 중국과 맞먹는다는 건 참담한 일이다.
2. 번역기 제작자는 ‘박근혜 정부의 지난 2년 3개월을 요즘 신조어 딱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며 안 알랴줌(번역: 안 알려줌)과 아몰랑(번역: 아, 몰라)을 꼽았다. 대통령의 불통에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우리는 여전히 대통령과의 소통을 간절히 원한다.
3. 인기 정치인을 꼽자면 그래도 대통령이 최고다. 갤럽의 최근 조사 결과 박 대통령이 ‘잘한다’는 평가는 33%로 떨어졌다. 단순비교는 무리지만 차기 주자로 언급되는 박원순 서울시장(17%), 김무성 문재인 여야 대표(13%), 안철수 의원(8%) 선호도보다 높은 수치다.
4. 물론 대통령은 말을 진짜 못한다. 잘못된 국어교육 정책의 적폐다(내 말도 녹음해서 다시 들으면 끔찍하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안 하는 것도 이 때문일 터다. 그러나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선 “메르스 확산이 잡혀 가고 있지만 상당수 확진환자들이 있어 한국 국민의 안전을 첫 번째로 두어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방미(訪美) 연기 이유를 친절히 설명했다. 대통령이 자나 깨나 생각한다는 국민한테는 김성우 홍보수석을 통해 알렸을 뿐이다. 한국 대통령이 한국에선 기자회견도 하지 않는 건 내국인 차별인가, 한국 언론이 싫어서인가?
5. 언론 책임이다(내 탓이오). 메르스 확진환자가 나온 지 2주 만인 3일 별로 긴급하지 않게 열린 메르스 긴급점검회의에서 대통령은 “이 상황에 대해서도 한번 확실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고… 그 방안에 대해서도 알아보고…”라고 ‘알아보고’를 반복했다.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대통령의 언어와 거리가 멀다. 이 답답한 말씀을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스 대응 과정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점검하고 현재의 상황과 대처 방안에 대해 분명하게 진단한 후 그 내용을 국민께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매끈하게 보도했다. 고대 그리스 정치인은 말(言)이라는 정치 수단을 통해 시민의 가슴을 움직였다. 한국 언론의 눈물겨운 서비스 정신이 말과 정치의 퇴보에 기여한다고 해도 할 말 없다.
6. 우리에겐 언제나 의병(義兵)이 있었다.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는 한중일 문화를 비교한 저서 ‘풍수화(風水火)’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한국 원형에 없는 반면 일본 원형에는 의병이 없다”고 했다. 우리가 낫다고 주장하진 않겠다. 단, 정부가 못 하면 국민이 한다.
7. 권위, 특히 무능한 정부에 대한 조롱은 작금의 시대정신이다. 번역기 제작자는 대통령 인신공격이나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 재미도 없이 무슨 수로 세금 바치며 각자도생(各自圖生)하겠나.
8. 풍자와 조롱이 분노로 바뀌는 건 좋지 않은 조짐이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다”라는, 2004년 김선일 씨 피랍 사건 당시 박 대통령이 “우리 국민 한 사람을 못 지켜 낸 노무현 대통령은 자격이 없으며 난 용서할 수 없다”고 한 말에 ‘좋아요’가 쏟아지고 있다. 지금 대통령이 병원으로, 시장으로 ‘메르스 현장 방문’을 하는 정도로는 반복된 정부 실패가 용서되지 않는다. 형편없는 공직 기강과 능력으로 초동 대처에 실패한 질병관리본부,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을 포함해 정부 내 누구 한 사람 문책하지 않고 어떻게 사태를 수습한단 말인가.
9. 그럼에도 박근혜 번역기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건 대통령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남아있다는 의미다. 내가 찍었든 안 찍었든 대통령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착한 국민이라는 점에서, 대한국민 만세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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